매거진 리브레

13. 리브레

#282 마르티

by 조이진

마르티

  쿠바는 여전히 독립하지 못했다. 격렬한 휴지기가 14년간 이어졌다. 독립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했다. 두 번의 전쟁에서 패한 독립 지도자들은 싸움을 끝까지 지속하고 또 승리하려면 사람들의 생각을 그에 맞도록 개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쿠바 엘리트들은 흑인과 백인이 쿠바인으로서 쿠바를 위해 함께 투쟁하고 함께 건설하는 국가에 대해 글을 썼다. 그들에게 쿠바는 모든 인종이 하나로 통합된 나라여야 했다. 쿠바의 건국이념으로 인종을 통합한 쿠바 내셔널리즘을 가장 앞장서 주창한 지도자가 호세 마르티는 검게 녹슨 무거운 쇠 족쇄를 차고 부두에 내리는 흑인 노예들을 보면서 성장했다. 10대 때는 링컨의 죽음에 깊이 슬퍼했다. 10년 전쟁이 한창일 때 16살 학생이었던 그는 스페인에 부역하는 동료 학생을 고발하는 글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신문을 발간해 6년의 중 노동형을 받아 투옥되었다. 어린 그는 아바나의 채석장에서 혹독한 강제노동을 당하면서 첫 문집 <쿠바 정치범 수용소에서El presidio político en Cuba>(1871)을 집필했다. 건강이 악화한 그는 스페인으로 추방되었다. 그곳에서 3년을 보내며 대학 교육을 마친 그는 파리, 뉴욕을 거쳐 멕시코에서 2년간 지내다 과테말라에서는 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10년 전쟁이 한창일 때 귀국한 그는 두 번째 전쟁이 발발하자 특별한 혐의도 없이 체포당해 북아프리카에 있는 스페인의 식민지 노역장으로 보내지는 길에 그는 뉴욕으로 도망쳤다. 마르티는 14년 망명 생활 동안 미국의 모습을 직시했고 라틴 아메리카 매체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남북 전쟁이 끝났지만, 오히려 확고해지는 인종 분리와 차별을 지켜보았다. 또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 불러야 마땅했지만, 단지 ‘아메리카’라고 부르고 있는 미국을 보았다. 아메리카에는 미합중국 말고도 또 다른 아메리카가 있다는 의식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자국을 아메리카 자체로 인식하고 말하는 미국인을 볼 때마다 마르티는 두려움을 느꼈다. 마르티는 ‘또 하나의 아메리카’를 쿠바 독립사상의 핵심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또 하나의 아메리카’를 ‘우리 아메리카Nuestra América’로 바꿔 불렀고, 자본과 군사력으로 라틴 아메리카를 위협하는 미국이 ‘우리 아메리카’에 곧 들이닥칠 최대 위협이며, ‘우리 아메리카’가 맞부닥칠 가까운 미래라고 설파했다.

jose-marti-statue-in-havana-richard-smith.jpg 아바나의 미 대사관을 가리키는 호세 마르티. 이 동상은 미국을 반드시 경계하라는 그의 메시지를 표현하고 있다.

  평생에 거친 호세 마르티의 가장 큰 관심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의 독립이었다.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로 남아있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는 아메리카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변수였다. 그는 뉴욕에서 신문 <조국Patria>을 발행하고 “모든 인종을 위한 공화국”을 표방하고 쿠바 혁명당을 조직했다. 혁명당은 준비 없이 봉기한 세스페데스가 전국적인 조직은커녕 동부 지역만이라도 촘촘히 연결한 혁명 지휘 조직을 갖추지 못해 패배했다고 분석하고 쿠바섬 전역의 모든 쿠바인과 푸에르토리코인이 동시에 봉기해 신속하게 전쟁을 끝낼 수 있게 준비했다. 그리고 두 차례의 전쟁 동안 군사 지도자로 떠오른 안토니오 마세오, 막시모 고메스 등과 함께 곧 있을 독립 전쟁을 준비했다. 미국에서 다시 강화되는 인종주의를 지켜보면서 쿠바를 바라보았다. 확고한 인종 차별 반대자였던 마르티는 인종 간에 완전하게 조화하고 피부색을 초월한 쿠바공화국을 꿈꾸었다. “어떤 피부색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인간이 특별한 권리를 가질 수는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로 충만해 태어난다.” 백인의 나라도 흑인의 나라도 아닌, 단지 쿠바인의 나라일 뿐인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화국을 꿈꾼 마르티는 “쿠바에서는 결코 인종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끝없이 주창했다. 그에게 독립투쟁은 인민들과 함께 그런 진실을 추구하면서 공화국 개념을 만들고 다져가는 여정이어야 했다. 흑인과 백인, 옛 노예와 노예주가 서로 화해 단결하고 독립 추진 세력으로 참여해 독립을 이루어내야 쿠바는 이제껏 세상에 없던, 인종 화해를 이룬 새로운 공화국으로 태어날 것이고,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색인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미국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는 새로운 국가가 될 것이었다. 그가 꿈꾸는 쿠바 혁명은 인류를 위한 혁명이었다. 그는 또 뉴욕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삼키려는 야욕으로 가득 찬 미국을 지켜보았다. 미국 문제는 곧 ‘우리의 아메리카’인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였다. 쿠바 독립은 결국 국제관계에서 힘의 작동의 결과로 이루어질 터였다. 만일 독립한 쿠바가 ‘또 다른 아메리카’를 탐내는 미국의 팽창을 저지한다면 쿠바는 미국의 팽창을 막는 브레이크의 역할을 하는 국가가 될 것이었다. 마르티는 뉴욕과 브루클린, 플로리다, 키웨스트 등지의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출신 쿠바 망명자 사회를 상대로 강연했고 가난한 그들은 마르티에게 독립자금을 모아 보냈다.   

4-1-Marti.jpg 쿠바 독립혁명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 우리나라의 백범 김구 선생의 위치와 비슷하다.

  마르티 일행은 혁명을 이루기 위해 먼저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있는 히스파니올라 섬에 들러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막시모 고메스 장군과 합류했다. 이들은 쿠바가 독립을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고 세계에 밝히며 혁명을 이룬 쿠바는 자유를 찾은 아메리카와 유럽 세계를 연결하는 교차로가 될 것이며 세계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세오 장군 형제와 19명의 전사가 선발대로 상륙했다. 2주 뒤 마르티와 고메스는 악어를 닮은 쿠바섬 동쪽 끝 바라코아 해안에 상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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