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브레

13. 리브레

#283 세 번째 전쟁

by 조이진

세 번째 전쟁

  미국에서 많은 눈들이 이들을 지켜보았다. 쿠바는 미국의 자본이 막대하게 투자된 곳이었다. 혁명전쟁이 3개월 밖에 진행되지 않았지만  쿠바 전쟁을 신문의 1면 머리기사가 7,000여 건이 넘었다. 뉴욕 헤럴드는 관타나모에 특파원을 파견했다. 이 기자는 미국 메이저 신문 1면 머리기사로 싣겠다며 인터뷰를 제안했다. 인터뷰는 꼬박 사흘 밤낮 동안 계속되었다. 긴 인터뷰  끝에 실린 머리기사는 노예 해방을 주장한 미국 북부의 “양키 세력”이 쿠바에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탐욕스러운 스페인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 벌이고 있는 일이라는 내용으로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권력을 전환하려는 과정이라는 내용이 덧붙여졌다. 미국인들의 이런 태도에 마르티는 별로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이 기사가 나간 지 몇 주 뒤 그가 멕시코의 지인에게 쓴 편지에는 “…. 날마다 나는 내 조국과 내 소명에 나의 목숨을 바칠 위험 속에 있습니다. 빠른 시기에 쿠바가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비롯한 앤틸리스제도와 ‘우리 아메리카’를 뒤덮는 미국의 팽창을 저지해야 하고…. 나는 지금 미국이라는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왔고, 그 괴물의 뱃속 창자 하나하나를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물매를 들고 싸울 뿐이지만 내 손에 쥐어있는 물매는 다윗의 물매이기도 합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쓴 다음 날 서투른 전사 마르티는 전사했다. 그가 쓰러졌어도 독립을 향한 역사는 계속 전진했지만, 그의 죽음은 쿠바 지도자들을 분열하게 했다. 만일 그가 살았더라면 틀림없이 독립된 쿠바공화국이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쿠바 역사는 지금과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피부색을 초월한 평등을 추구하는 쿠바 민족주의와 외세를 배격한 쿠바공화국 건설이라는 마르티의 이념은 피델 카스트로 혁명의 기치가 되었다.

907987081_8b0134bc24_z.jpg 쿠바 혁명의 발상지 산티아고 데 쿠바 광장의 호세 마르티 동상. 민중의 저항을 상징하는 마체테가 호세 마르티와 함께 있다.


  마르티가 죽은 해 말 시에라 마에스트로 산에서 내려와 세 갈래로 진격한 해방군은 마침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집중한 아바나와 마탄자스의 방어선을 돌파해 서부 진격에 성공했다. 그들이 지나는 곳의 사탕수수밭은 불태워졌다. 스페인의 재정을 압박하려는 해방군은 플랜테이션 소유주에게 사탕수수를 심지 말라고 명했고, 설탕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스페인 총독은 심으라고 명령했다. 해방군은 사탕수수밭을 불태워 노예 노동에 기반해 대량 생산하는 토지 집중 소유와 수탈 구조를 해체하고자 함이었다. 막시모 고메즈 사령관은 스페인인과 그 부역자들의 토지를 몰수해 해방군인에게 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자본 집중적 대규모 토지 소유제에서 독립 농가들이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하는 원칙으로 토지 혁명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해방군은 흑인과 백인이 따로 나뉘지 않고 하나의 부대로 편성되었고 사령관과 지휘관들은 일반병과 똑같이 생활하고 위험에 노출되었다. 안토니오 마세오 장군은 22차례나 총탄에 맞았다. 흑인 해방군 맘비들은 중요한 전투에서는 총을 쏘았지만, 허리춤에는 마체테를 지니고 다녔다. 마체테는 익숙하게 휘둘러 사탕수수를 베던 칼이었다. 그 칼을 잘못 휘둘러 제 팔목, 제 발목을 자르던 칼이었다. 총알이 떨어지면 맘비들은 마체테를 휘둘러 돌격했다. 해방군이 15분 만에 스페인군 6개 중대를 몰살한 일도 있었다. 스페인 군대는 스페인 마우저라고 불리는 최신 M1893 5연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모두 10대 소년 신병들이라 소총을 다룰지 몰랐다. 해방군 1명이 스페인 군인 100명 이상의 목을 쳤다. 콩고의 철의 신 은자라반다가 맘비를 구원하기 위해 피로 물든 마체테로 현현했다. 마체테는 맘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해방의 상징이었다. 해방군 군악대가 전투에 선봉에 섰다. 오케스트라는 승리를 축하했고 해방을 연주했다. 해방군들이 진격하는 마을과 들판마다 쿠바 민중들은 환호했고, 도시에서는 창문을 열고 대문을 나와 “쿠바 리브레”를 외쳤다. 스페인 관리들은 이번에도 잔인하고 무도한 짓을 일삼을 것 같은 동부의 흑인들이 벌이는 폭동이라는 속뜻으로 “코에 링을 한 흑인”들이 벌이는 난동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아바나와 마탄사스의 주민들이 모두 거리에 나와 해방군의 코에 무엇이 걸려있는지 살폈고, 코에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것을 보고 오히려 놀랐다. 아바나에 해방군이 도착함으로써 스페인이 오랫동안 만들어 놓은 동부 해방군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주입받고 있었는지, 자기들의 인식이 잘못되었는지를 직접 확인하며 해방군이 건설하려는 새로운 나라와 피부색에 대한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 플랜테이션에서 노예제도는 9년 전에 폐지되었다지만, 여전히 흑인들에게 자유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해방군이 지나가는 곳마다 노예나 다를 바 없던 노동자들이 대열에 합류했다. 대열에 합류하는 일은 쿠바를 해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해방군은 스페인군의 목도 잘랐고, 스페인에 부역한 자들의 목도 벴다. 1896년에 해방군은 아바나에 가까이 왔다. 이번에는 학생들과 작가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호텔 잉글라테라의 카페에 모여 앉아 다시 돌아온 해방군 사령관 안토니오 마세오와 함께 투쟁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해방군에 합류하는 병사들이 너무 많아 이제는 지원자들을 돌려보내야 할 지경이 되었다. 해방군은 아바나를 점령하고 쿠바섬 서쪽 끝까지 진격했다. 관타나모에서 시작한 안토니오 마세오와 막시모 고메스가 이끄는 해방군은 78일 만에 27차례의 큰 교전을 치르고 1,600km 간의 행군을 해 90일 만에 섬 전체를 장악했다. 이 장정을 취재한 젊은 윈스턴 처칠은 “살아 숨 쉬는 혁명의 장면이 연일 펼쳐지고 있다. 정말로 이곳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라고 썼다. 처칠의 전망대로 해방군들은 400년 스페인 식민 통치를 끝낼 치명타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1896년 무렵 쿠바 독립군


No me pongan en lo oscuro 나를 어둠 속에 가두지 않겠소

A morir como un traídor 배신자들이 죽어 어둠에 갇히듯 말이오

Yo soy bueno y como bueno 나는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이 그렇듯이

Moriré de cara al sol 나 죽어 태양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으리

- 호세 마르티의 <꾸미지 않은 시Versos sencillos>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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