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반격
반격
혁명의 열기는 절정에 달했고 승리는 임박했다. 그러나 그 열기를 차갑게 식히고 승리의 환희도 깨트려버릴 순간도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1896년 1월 아바나의 한 극장에서 부포 공연이 열렸다. 이 극장에는 스페인 국기 대신 쿠바 국기가 걸렸다. 쿠바 국기를 상징하는 색상의 옷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입장해 “사탕수수를 키우는 땅이여 영원하여라”라는 노랫말을 외쳤다. 이때 친스페인 성향의 무리가 난입해 총을 쏘아 10명이 죽었다. 그 뒤 사흘 동안 아바나 시내에서는 14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스페인은 새로운 쿠바 총독 웨일러를 파견했다.
그의 사명은 반란을 진압하고 설탕 생산량을 늘려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페인군의 패인을 반란군의 게릴라 전술 때문으로 보았다. 그들은 기습이 끝나면 시골 산골 마을로 돌아가 마을 사람들과 섞여 살았으므로 추적해 체포하기 힘들었고, 마을 사람들도 그들에 동조해 쉴 곳과 음식을 제공했다. 신임 총독은 설탕을 생산하는 노동자 농민들과 반란군을 분리하는 재집중화 전략을 선택했다. 총독은 쿠바섬을 여러 지역별로 구분하고 모든 쿠바 사람들을 인근 도시의 시설로 강제 이주시켜 억류했다. 이주 기간으로 8일만 허락되었다. 군대를 보내 반란군이 은신처로 삼을 만한 시골의 집과 농작물, 동물들을 모두 불태웠다. 3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을 지역별 수용소마다 수 천 명씩을 가두었지만 식량이나 주거 대책은 없었다. 재집중화reconcentrado로 반군의 근거지를 제거하기는 했지만 수용소에서는 심각한 기아와 전염병이 불가피했다. 그가 부임한 지 2달 만에 세계 언론은 이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아와 전염병, 사망자 상황을 매일 같이 전했다. 미국 언론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대개 굶주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린이 사진과 스페인 군인 앞에 무릎 꿇은 쿠바 사람을 담은 사진으로 1면을 채웠다. 크고 굵은 활자체와 과장되고 선정적인 머리글로 꾸민 큰 보도 사진은 신문의 발행 부수를 늘려주는 효과를 입증했다.
스페인은 인간의 윤리 운운하는 세계 여론에 개의하지 않았다. 웨일러는 전세를 전환해 냈고, 부상한 자든 체포된 자든 항복한 자든 모두 살해했다. 해방군의 게릴라 전술에 타격을 입힌 다음 웨일러는 아바나 인근에 방어선을 침으로써 마세오가 이끄는 서부 해방군과 막시모 고메스가 있는 동부 해방군을 분리했다. 최후의 일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세오는 불굴의 전사였다. 웨일러가 스페인이 쳐놓은 방어선을 자랑하면 마세오는 그것이 무용지물임을 입증해 주었다. 그는 서부에서 동부로 가고 싶은 날을 미리 예고하고는 방어선을 넘나들었다. 웨일러가 마세오가 죽었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면 즉시 아바나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마세오는 쿠바에서는 물론이고 스페인과 유럽, 미국에서도 유명한 지도자로 알려졌으나 끝내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마세오는 민중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지도자였지만, 지도부는 그의 독단적인 행동을 비난했고 반대로 마세오는 혁명 지도부의 탁상공론과 보급의 지연에 불만이 있었다. 군부는 분명히 흑인들이 주도하고 있었고 혁명 지도부는 대개 백인들인 현실에서 생겨난 이런 알력으로 새로운 공화국의 정부 지도부와 군부 사이 역할과 관계 설정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호세 마르티가 없는 해방군에서 인종 갈등은 분명히 다시 발효되고 있었다. 혁명정부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마세오는 이 점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쿠바 섬의 동-서부의 중간인 까마궤이에 혁명 정부의 사령부를 두고 있던 고메스는 달랐다.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마세오가 동부에 있어야 했다. 마세오는 다시 한번 아바나를 지나 섬의 동쪽으로 행군하던 중에 버려진 설탕 제당소에 설치된 해먹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총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마세오의 머리뼈에서 피가 솟았다. 또 한 번의 총소리가 났고 이번에는 그의 심장을 터트렸다. 마세오가 죽었다는 소문에 혁명군은 그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한 군사 반격으로 그것이 가짜 뉴스라는 것을 증명해 주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바나에서도 그의 죽음을 축하하는 연회와 대중 집회가 연이어 열렸다. 스페인 관료들과 가톨릭 사제들이 그의 죽음에 환호했고 아바나 대성당의 종들도 몸을 흔들어 그의 죽음을 널리 타전했다. 그들 생각에 마세오 없는 해방군은 오합지졸이니 전쟁의 승부는 가려진 것과 진배없었다. 고메스는 그의 죽음을 선언하고 10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병사들도 장군들도 모두 울었다. 타전된 뉴스를 들은 뉴욕의 쿠바인도 울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도 울었다. 흑인들에게 마세오는 시대의 영웅이자 전설로 기억되었다.
안토니오 마세오와 호세 마르티라는 탁월한 지도자를 잃었지만 1898년에 쿠바의 세 번째 독립 전쟁은 승리가 임박했다. 그해 쿠바가 독립할 것으로 전망한 막시모 고메스는 마지막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고 이번 일격으로 스페인을 대서양 밖으로 축출할 것이었다. 미국 정부도 이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미 국무장관은 “쿠바에서 스페인은 이제 완전히 희망이 없다.… 스페인은 전쟁을 수행할 자금이 고갈되었고, 국력도 쇠락했다. 반면 쿠바의 저항 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중력이 사과를 떨어뜨릴 시간이 다가왔음을 확신한 미국도 행동에 나섰다. 스페인 정부는 쿠바에 협상을 시도하기 위해 쿠바인들의 원성의 표적인 웨일러를 소환하고 1898년 1월 1일부터 쿠바에 군사, 외교, 법률을 제외한 정치, 경제적 자치권과 재산 유무나 문맹 여부를 가리지 않고 의회를 구성할 선거에 투표권을 주겠다고 했다. 쿠바 지도자들은 제안을 거부하며 완전한 독립 없는 평화의 허구를 비판하고 “독립 투쟁으로 우리의 지도자들과 15만여 명의 쿠바인들이 숨졌다. 우리가 만일 지금 스페인과 협상한다면 그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저주할 것이다”라며 누구든 스페인 당국과 협상하려는 자는 공화국 헌법에 따라 처벌할 것임도 천명했다. 오직 완전한 독립에 대해서만 대화할 뿐이라고 했다. 스페인에서도 그런 협상은 스페인의 약함을 드러내 보이는 일일 뿐이라며 쿠바에 자치권을 주는 것에 반대하는 세력도 여전히 있었다. 1898년 1월 “완전한 독립을 달라”라는 구호와 “웨일러 만세”를 외치는 구호가 아바나 거리에서 뒤섞였다. 스페인이 웨일러를 불러들이고 협상을 시도한 것은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자국의 투자와 교역을 보호하고 쿠바의 질서를 회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쿠바에 자치권을 주어 타협할 것을 스페인에 강권했음이 알려져 정부 사무소를 공격당한 미국은 전함 메인호를 아바나 항구에 배치했다. 미국은 자국의 투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 배를 완전히 무장하고 있었다. 메인호의 최신 무기들과 기동력으로 볼 때 아바나시의 주요 시설을 포격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미국 정부는 친선 목적의 방문이라 했지만, 무력시위임이 분명했다. 또 스페인이 아무리 많은 양보를 한다고 해도 스페인이 쿠바를 계속 식민지로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쿠바의 스페인인들이 미국에 접근해 ‘스페인 본국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고, 스페인이 우리 재산을 반란군들에게 맡기고 떠나면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몰수당할 것이니 우리는 미국이 우리를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다’라고 했다. 쿠바에 주재하는 미국 관리는 “쿠바의 플랜테이션 소유자들과 자산가들은 쿠바 섬이 이제 곧 스페인의 아귀에서 미끄러져 나와 미국의 품으로 들어가는 상황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라는 보고서를 워싱턴에 제출했다. 호세 마르티는 죽기 전날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양키든 스페인인이든 주인을 원하는” 쿠바인들이 있는 현실을 걱정했었다. 호세 마르티는 또 미국이 쿠바에 개입하면 쿠바는 영영 독립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도 예견했었다. 앞서 멕시코 영토를 빼앗은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근심했던 전쟁의 결과가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이제 쿠바인들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이웃을 상대해야 했다. 1790년대 토머스 제퍼슨 이래로 1820년대 애덤스와 먼로,1840년대 포크 그리고 1850년대 피어스와 뷰캐넌을 비롯한 거의 모든 미국 행정부가 쿠바가 언젠가는 미국의 섬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력이 일하게 될 시간을 기다렸다. 스페인이 더 비틀거릴 때를 기다려왔다. 미국에 쿠바는 미국이 아닌 누구의 것일 수가 없는 섬. 심지어는 쿠바인들의 섬이 되어서도 안되었다. 미국이 보기에 쿠바인들은 스스로 독립할 능력도, 독립된 나라를 지속할 능력도 없어 보였다. 그것이 미국이 ‘또 다른 아메리카’를 보는 시각이었다. 1898년 초 쿠바인들이 스스로 독립을 쟁취할 때가 임박한 순간은 쿠바라는 사과가 나무에서 분리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르티가 가장 걱정했던, 스페인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닌 미국이 쿠바를 덮칠 것이라는 예언은 현실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