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시드의 노래
엘 시드
그래서 스페인 문학사 교과서의 첫 작품은 <시드의 노래Cantar de Mio Cid>. 스페인은 이 작품 이전에는 문학은 없었다고 본다. 스페인 문학사는 가이나가 부른 여류문학, 칸티가 같은 교회 음악, 지르얍의 시가 문학을 교과서에 싣지 않는다. 엘 시드El Cid라 알려진 주인공은 로드리고 디아즈 데 비비르Rodrigo Díaz de Vivir. 그의 긴 이름을 아는 스페인 사람은 별로 없다. 엘 시드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영웅이기 때문이다. 엘 시드는 모슬렘들이 자신들의 영웅에게 붙여주던 별칭 '알 사이드'를 스페인어식으로 발음한 말이다. 엘 시드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벌어진 오랜 전쟁에서 이쪽저쪽을 넘나들며 변신한 군인이었다. 부르고스 궁정에서 페르난도 1세의 아들 왕자와 함께 친구로 자랐다. 엘 시드와 함께 자란 그 왕자가 나중에 카스티야 왕 산초 2세로 즉위했다. 산초 2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22살의 엘 시드를 군사령관에 임명했다.
엘 시드는 어렸을 때부터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카스티야 왕을 섬겨 무어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라고사 왕국을 원정했고 이 땅을 카스티야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바스크 형제 왕자들끼리 다툰 영토 전쟁 '세 안초의 전쟁Guerra de los Tres Yanchos'에서 레온의 알폰소 6세가 이겨 레온-카스티야 통합 왕이 되었다. 알폰소 6세에게는 얀초 2세의 벗이자 동지였던 엘 시드가 권력 투쟁의 상대 진영의 장수이자 위협적인 정적이었으므로 그를 카스티야에서 추방했다. 카스티야는 엘 시드가 산초 2세와 함께 성장하고 활약한 근거지였으므로 카스티야 사람들에게 엘 시드는 암살당한 산초 2세에 버금가는 인기가 있었다. 갈 곳 없는 그가 모슬렘 타리파의 근거지 사라고사로 향했다. 바스크 인근 지역에서 기독교 세력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 허약한 이교도 소왕국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용맹한 장수가 필요한 처지였고, 도망자 엘 시드도 살기 위해서는 모슬렘이라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10년 동안 모슬렘 군주에게 충성했다. 그러면서 모슬렘의 통치술과 이슬람 율법, 그리고 관습을 터득했다. 이것이 나중에 그가 발렌시아를 정복하고 통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모슬렘의 창과 칼이 되어 기독교 세력을 적 삼아 싸워 연전연승했다. 그는 모슬렘들의 영웅이었고, 극진하게 대접받아 '엘 시드 캄페아도르El Cid Campeador'라는 칭호를 받았다. 모슬렘들은 기독교인과 싸워 이긴 장수라는 뜻에서 그를 '알 사이드'라 부르기 시작했다. 모슬렘들을 위해서 기독교도와 싸웠던 그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이베리아 모슬렘들이 쇠락해 기독교 세력에게 연전연패할 무렵, 북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에 근거를 둔 이슬람 세력인 알모라비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힘이 빠진 이베리아 모슬렘들이 알모라비드를 끌어들였다. 사막의 오랑캐라는 베르베르족답게 그들은 사나웠고 기독교 기사들은 그들의 낯선 전쟁 방식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용맹왕El Bravo이라는 칭호가 붙은 래온-카스티야 왕 알폰소6세가 참패했다. 이제 엘 브라보는 엘 시드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고 기독교도를 적으로 싸워 모슬렘들의 전쟁 영웅이 된 엘 시드를 기독교 진영의 장수로 다시 데려왔다. 엘 시드는 기독교를 위해서도, 이슬람을 위해서도 싸우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싸웠다. 비싼 이적료를 지불하고 데려온 장수가 출전하지 않고 전황을 지켜만 보며 다른 궁리를 하다 돈 많은 모슬렘 왕국 발렌시아를 자신이 차지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계산에 이르자 다시 모슬렘들의 땅 발렌시아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곳에서 모슬렘들끼리 소요 사태가 있을 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고, 모슬렘들을 격파했다. 엘 시드는 마침내 발렌시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주변의 이슬람 소국 타리파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세금을 받았다. 엘 시드에게 속아 성문을 열어준 알모라비드 왕은 체포되었고 산 채로 불타 죽었다. 엘 시드는 평생의 라이벌 알폰소 6세와는 독립적으로 발렌시아를 통치했다. 엘 시드는 발렌시아의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을 가톨릭교회인 발렌시아 대성당으로 개조했다. 엘 시드는 왕으로 재임한 5년 만인 1099년에 다시 쳐들어온 알모라비드 왕조와의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죽었고, 발렌시아는 다시 모슬렘의 것이 되었다. 엘 시드의 아내는 그의 유해를 고향 부르고스로 옮겼고, 대성당의 가운데에 묻었다. 이 성당에는 엘 시드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물이 벽에 걸려있다. 엘 시드의 궤Confre de El Cid다. 그는 알폰소 왕에게 추방당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군사들을 먹여 살릴 자금이 필요했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에게 이 궤짝을 담보로 맡기고 거액을 빌렸다. 그는 이 궤짝 속에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있다고 했으나 실상은 돌멩이와 모래만 가득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관점과 듣는 이들의 관점이 맞을 때 이야기는 흥미와 공감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기독교도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시드의 노래>는 기독교도들이 듣고 좋아하는 내용으로 지어졌고 그래서 기독교도들의 기록으로 남았다. 돈을 빌리면서 유대인을 속인 엘 시드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통쾌해하는 이 궤짝 이야기는 반대로 그에게 속은 유대인들을 탐욕스러운 자들이라며 조롱하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도 엘 시드의 이런 참모습을 모르지는 않았는지 그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혔다. 그가 다시 스페인의 영웅으로 부활하게 된 것은 1939년의 스페인 내전 때문이었다. 프랑코는 부르고스를 정치적 수도로 삼아 프랑코 독재정권을 세웠다. 스페인은 이미 오래전에 해가 진 제국이 되었다. 독재자는 쇠락한 국가의 옛 영화를 되살려줄 영웅을 필요로 했고 자신이 제2의 엘 시드라고 소리쳤고 부르고스 광장에 거대한 엘 시드 기마상을 세웠다.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막대한 황금을 실어 오는 동안 카미노는 잊혔는데 20세기에 독재자 프랑코가 오랫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부활시켰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은 부르고스를 거쳐야 하는데, 프랑코는 해가 지지 않았던 스페인 제국, 가톨릭을 수호한 스페인의 역사를 자신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써먹고자 카미노 길을 다시 열었다.
+ 카스티야의 주도 부르고스는 바스크족이 세운 도시로 이베리아 북쪽에 있다. 부르고스의 말인 카스티야 지역어가 현대 스페인어다. 이런 이유로 부르고스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어머니 같은 곳이다.
+ 엘 캄페아도르는 '용맹한 장수, 전쟁 영웅'에 해당하는 말이다.
+ 스페인 문학사에서는 앨 시드라는 별칭이 생겨난 배경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이슬람 편에서 기독교인을 적으로 삼아 싸워 생겨난 별명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유럽이 되기로 선택한 스페인으로서는 모슬렘의 영웅이었던 그가 이슬람 진영에서 기독교인과 싸웠던 활동은 빼고, 다시 기독교인 진영에서 이슬람을 상대로 활약했던 이야기만 다룬다.
+ 알 사이드는 이슬람 사회에서는 술탄의 지위에 있는 지도자에게 사용하는 경칭이다. 영어 Sir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