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말레콘

14. 말레콘

#292 차파라

by 조이진

차파라

미국 자본은 기계와 엔지니어를 데려왔다. 엔지니어라 불리는 몇 안 되는 일꾼들은 기계화 또는 자동화라는 이름의 시스템을 들여오더니 수백 년 동안 노예라는 사람들이 해왔던 일을 빠르대 대체했다. 쇠로 만들어진 번쩍번쩍 빛나는 기계는 사탕수수를 밀어 넣으면 즙을 추출하더니 마른 설탕 가루로 만들어냈다. 공정마다 분쇄기, 세단기, 착즙기, 원심분리기, 보일러, 증발 건조기 같은 처음 듣는 이름들도 있었다. 콜럼버스 시대부터 사탕수수 농사를 지었던 다이노나 흑인 노예들이었다면 당최 알아듣지 못했을 것들이었다. 원당을 추출할 때까지 원가를 낮출수록 이익은 늘어날 것이었다. 토지를 소유한 미국 기업들은 농번기에만 노동력을 사용하려고 이웃한 아이티나 자메이카 같은 영국 식민지 섬에서 저가에 노동력을 수입해 사탕수수를 심었고 또 수확했다. 쿠바의 설탕 산업이 한참 호황일 때는 아이티와 자메이카에서 한 해 58,000여 명의 노동력이 쿠바에 들어왔다 되돌아가기도 했다. 팔마 정부는 미국 토지주가 경작할 수 없는 땅을 쿠바 농민들에게 임대했고 그 수확물을 백인들에게 되팔게 했다. 설탕 기업들은 제당 공장 주위에 배럭스를 지었다. 기업 도시가 조성되었다. 설탕 생산이 늘수록 기업 도시의 경계선으로 쳐진 위협적인 철조망은 넓어졌고 그럴수록 쿠바공화국의 영토는 줄었다. 쿠바는 인간의 역사에서 처음 생겨난 새로운 방식으로 운영되는 공화국이기도 하면서 왕국의 모습도 띤 낯설고 기괴한 형태의 체제로 바뀌고 있었다.

해방군 장교였던 메노칼은 영어 실력으로 미국의 신임을 받아 설탕 자본을 유치했고, 쿠바의 3대 대통령이 되었다.

넉 달도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미-서 전쟁이 싱겁게 끝났을 때 1899년 한 무리의 월 스트리트 투자가들이 아바나에 도착했다. 쿠바에서 수익성 높은 투자처를 찾으려는 방문이었다. 지금 미국과 유럽은 산업화로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화가 진행되고 소득이 늘어나 설탕 소비도 크게 늘고 있었다. 일행 가운데 텍사스 정치인 홀리도 있었다. 홀리는 루이지애나에 제당 공장을 소유한 설탕 사업자이기도 했다. 홀리 일행을 가르시아 메노칼이 영접했다. 해방군 장군이었던 메노칼은 미군정이 미국 자본의 자유 투자지역으로 지정한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었다. 해방군을 지휘했을 때 이 지역을 담당해 지역 사정에도 훤한 그는 미국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었기에 영어에도 능통했다. 월스트리트의 투자가들에게 그는 안성맞춤의 인물이었다. 메노칼은 미군정 때 아바나 경찰청을 조직해 벌써 미국에 협조하고 있었다, 그는 훨씬 더 높은 곳을 겨누고 있었다. 메노칼은 홀리에게 독립 전쟁 때 불탄 마탄사스 지방의 차파라 아시엔다 제당소를 인수하라고 추천했다. 그해 월스트리트에서 100만 달러를 투자받은 홀리는 메노칼을 쿠바 사업장의 지배인으로 고용해 토지를 매입하고 새 원당 추출 공장 건설을 감독하게 했다. 설탕을 이용한 부가가치가 높은 제과 상품은 미국 뉴저지에 세운 제과 공장에서 생산했다. 쿠바의 이 공장은 하루 9,100t의 사탕수수를 가공해 1년에 설탕 200,000포대 40,000t을 생산했고, 세계 최대 규모의 설탕공장으로 쿠바의 연간 총 설탕 생산량 가운데 10%를 차지했다. 미국 정치인들이 쿠바에 설탕 플랜테이션을 소유한 일이야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거대한 규모로 접근하는 사례는 처음이었다. 콜럼버스가 탐험했던 쿠바 해안의 울창하고 아름다웠던 숲은 콜럼버스가 처음 들여와 농업을 시작한 사탕수수밭으로 변했다.

1920년대 차파라 제당. 오늘날은 기업도시라 부르지만 그때는 '식민지colony'라고 불렀다.


1910년대에 차파라Chaparra 제당은 기업 도시의 모습을 갖췄다. 충분히 넓게 둘러쳐진 울타리 안에 10,000여 명이 살았다. 이 ‘식민지’ 도시는 흰색 회벽칠을 한 근사한 주택과 아름다운 목조 가옥이 섞여 있었고 처음부터 계획해 만든 도시답게 동서와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은 넓고 반듯했다. 도시 한가운데에 호텔이 있었고, 10개의 학교에는 학생들이 가득 찼고, 극장도 세 군데나 운영되었다. 설탕 수확기에 출장으로 온 미국인 엔지니어가 묵을 별장 같은 고급 숙소들이 들어선 주택 단지가 있었고 직원들을 위한 병원과 치과의원,  세탁소와 약국, 우체국도 운영되었고 YMCA도 있었다. 이곳은 쿠바 안에 있는 미국의 한 도시였다. 차파라 제당은 화폐도 발행해 이 도시 안에서 거래하게 했다. 쿠바 정부가 발행한 법정 통화는 교환되지 못했다. 차파라 화폐는 기업 도시의 울타리를 벗어나 산티아고 데 쿠바를 비롯한 오리엔테 지역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되었고 심지어 아바나와 이웃한 미국인들의 집단거주지인 마탄사스에서도 통용되었다. 경제도, 법률도, 언어도, 문화도 쿠바의 것이 아니라 미국의 것이었다. 차파라 제당은 수확기에 필요한 만큼 노동자들을 수입했다. 이 식민도시에 얼마의 인구가 거주하게 될지를 차파라가 결정했고 인종 간 구성 비율도 그들이 정했다. 얼마만큼의 토지를 쿠바 농민에게 경작하게 할지, 누가 어디서 무엇을 심을지도 차파라가 결정했다. 기업 도시 안에서 차파라가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통제하고 결정했다. 쿠바공화국 안이었지만, 중세 유럽의 왕국이 다시 세워졌고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식민지’라는 이름으로 영토를 넓혔다.

  미국에서 공학을 전공한 메노칼은 사업 부지를 결정하고 땅을 개간해 농경지를 조성하고 공장을 설치, 건설하는 일을 감독했다. 공장업무를 수행할 부서 책임자들 자리는 독립 전쟁 때 메노칼과 함께 싸웠던 해방군 전역자들로 채웠다. 그들에게도 사탕수수를 경작할 부지를 일부 나눠주었다. 지역 경비대 경찰들에게도 이권을 나눠주었다. 한 스페인 기자는 이 기업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잔인한 가혹행위를 취재했다. 기자는 차파라 호텔에 투숙했던 밤 멀리서 들려오는 구슬픈 노래를 듣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어서어서 사탕수수를 베야 해. 어서 불을 밝혀라. 서둘러야 해. 살을 찢는 채찍 휘두르는 메노칼이 저기 오고 있잖아.” 높은 철조망 울타리가 둘린 제당소 기업 도시들은 경제·정치적으로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쿠바 공화국의 법과 공권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노동자들은 저항할 수도 없었다. ‘식민지’라는 이름의 여느 동물농장일 뿐이었다.

  차파라가 미국 최대 설탕 기업이기는 했어도 이는 여러 조각 가운데 하나의 조각일 뿐이었다. 1905년에 미국인들이 소유한 설탕 회사는 쿠바 총 설탕 생산량의 21%를 생산했다. 20년이 지난 1926년에는 미국인 소유 75개의 제당소가 쿠바 총 설탕 생산량의 63%를 차지했다. 미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와 제당 회사들이 갖은 기업 도시의 권력을 합하면 쿠바섬은 미국의 설탕 왕국이었다. 설탕 사업의 수익은 모두 미국으로 보내졌다. 매일 엄청난 양의 설탕을 생산해 미국으로 실어 날랐고 사탕,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완제품은 미국에 있는 제과 회사들이 만들었다. 땅 말고는 쿠바에 재투자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유무역주의 협정은 미국 상품이 쿠바로 수입될 때도 관세 혜택을 부여했다. 포드의 컨베이어 시스템은 미국식 대량생산 - 원가 인하 - 가격 경쟁 구조를 만들어냈고, 대량 생산 시스템이 만들어낸 값싼 공산품이 쿠바에 수입되었다. 쿠바에서 제조업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었다. 쿠바 정부는 새로운 산업을 촉진해 자국 산업 구조를 다각화할 방법도 갖지 못했고, 낙후된 기존 산업의 활로를 찾을 길도 없었다.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미국의 슈가코노미. 그것만이 쿠바 정부의 유일한 경제정책이었다. 독립하자마자 가장 먼저 서둘러 체결한 대미 자유무역협정은 쿠바 섬을 설탕이라는 플랜테이션 안에 가둔 대못질이 되었다. 미국은 쿠바라는 실험실에서 단일종목 경제 모델을 개발했고, 그 수익성을 검증했다. 이것은 미국의 신식민주의 또는 신제국주의 경제를 상징하는 모듈이 되어 중남미 아메리카와 필리핀 등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기회를 잡고 싶은 쿠바인들은 미국 자본에 고용되어 일했다. 미국인들은 그들을 주니어 파트너라고 불렀다. 이들도 대개는 해방군 출신이었다. 마세오 장군의 부관이었던 호세 라크렛은 플랫 수정안에 강력하게 반대한 제헌의회 의원이었다. 1902년 그가 쿠바에 투자하려는 미국인들을 위한 부동산 투자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바나 영어신문에 ‘쿠바 땅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으니 농지나 플랜테이션, 광산, 삼림 목재를 사거나 팔고자 할 때 또는 그런 자산을 담보로 리스를 하려 할 때’ 자신과 상담하라는 광고를 실었다. 미국인들에게 고용되어 일한 자들이 쿠바 정부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인의 자산을 관리하는 자가 지방자치 의회의 의원이 되었고, 미국인 소유 제당 회사 지배인으로 25년간 일한 사람이 관타나모 시장이 되었다. 한 쿠바 상원의원이 유나이티드 푸르트사의 설탕 사업 분야 책임 자문역을 맡은 뒤 유나이티드 푸르트 사는 법인세를 전액 감면받았다. 미국인에 고용된 쿠바인 가운데 가장 높은 직위에 진출한 자는 회초리를 휘둘러 살갗을 찢던 차파라 제당의 총괄 운영자 마리오 메노칼이었다. 1912년 미국인에 부역해 온 메노칼이 쿠바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설탕 왕국인 쿠바에서는 미국 제당 기업이 왕이었다. 그들은 유력한 쿠바인을 고용하거나 결탁해 법을 왜곡, 무시하거나 아예 바꾸었다. 세금을 면제받는 사업자가 되었고, 노동자를 사적으로 처벌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미국 기업은 그들 뒤에 미국 행정부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갈등은 워싱턴 D.C가 조정하고 해결해 줄 것이었다. 플랫 수정안은 미국인들에게 천국 같은 특권을 누리는 쾌적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1903년에 체결된 쿠바-미국 조약은 관타나모 만에 미 해군 기지 설치를 위해 토지를 임대할 수 있는 미국의 권리를 확인했다. 미국 국무장관 태프트가 추진한 이 조약에 의하면 미국은 매년 설탕 몇 부대 값에 해당하는 2,000달러를 임대료로 내고 관타나모만 해역을 임차하며, 임차 기간은 한정되지 않았으며, 오직 양국이 합의했을 때만 내용을 변경할 수 있었다. 쿠바에는 모욕적이었지만 미국의 성에 찰만한 조약은 아니었다. 애초에 태프트는 시엔푸에고스를 포함해 4개의 만을 영구 임대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의 임차지에 그쳤어도 미국 투자자들에게 이 기형적인 공화국은 투자의 최적지였다. 뉴욕 마피아들도 쿠바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1920년대 쿠바 관광상품 안내 광고. 미국인들에게 쿠바는 환락의 천국이었다.

  아바나는 동부의 미국 설탕 왕국과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근대적인 에너지가 도시에 충만했다. 스페인 왕의 이름을 딴 거리를 쿠바 독립 영웅의 이름으로 바꾸고 기억하려 했다. 미국이 점령한 쿠바를 넘볼 적은 세상에 없었으므로 해적을 막기 위해 대양을 노려보는 아바나만 입구 라 푼타 요새의 대포는 쓸모가 없어 녹이 번지고 있었고, 다만 미국 관광객에게 아바나를 소개할 관광상품 소개 카탈로그의 자료 사진으로 이용될 뿐이었다. 넓은 광장에는 대포를 배경 삼아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는 무대가 설치되었다. 스페인 총독이 사열하던 아르마스 광장도 변했다. 총독의 무기는 버려지고 시민들이 휴식하는 공원으로 바뀌었다. 1906년에는 아바나에 미국식 순회 서커스 공연과 놀이공원을 상징하는 회전목마가 돌았고, 아름다운 아바나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러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제작진이 첫 촬영을 시작했다. 1903년부터 아바나에 자동차 경주대회가 시작되었고 메르세데스와 프랑스산 다라크Darracq, 마세라티 같은 최고급 경주차들이 아바나의 미라마르와 베다도를 질주했다. 1904년 단기 통 엔진의 캐딜락이 들어온 뒤로 4,000여 대의 최고급 자동차가 대서양 파도의 물거품이 설탕처럼 덮치는 낭만적인 말레콘 대로를 달렸다. 산업공학의 혁신으로 대량 생산에 성공한 포드자동차는 ‘모델 T-포드’를 365달러라는 놀라운 가격에 판매하여 부자들의 상징물이었던 자동차를 중산층의 일상품으로 인식을 바꾸었고 ‘모델 T-포드’는 쿠바에서도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였다. 

말레콘은 자동차 경주가 열리기 좋은 곳이었다. 아바나는 명차와 고급 브랜드들의 마케 공간이었다.

1914년에는 아바나에 첫 택시 회사가 영업을 시작했을 때 ‘모델 T-포드’ 택시였다. 1925년에는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아바나까지 531마일을 달리는 자동차 경주 대회가 열렸고 5명의 자동차 레이서들이 메르세데스와 마세라티 등을 타고 9일 만에 주파했다. 카리브의 희고운 구름을 배경으로 대서양 파도를 따라 고급 경주차들이 달리는 말레콘은 이제 막 시작한 영상 시대가 요구하는 최고의 촬영 장소였다. 카레이스가 열리는 말레콘은 코카콜라 같은 미국 기업들이 광고 프로모션을 겨루는 가장 뜨거운 비즈니스의 현장이 되었고 최고급 승용차들의 신차 발표회 장소로 최적지로 꼽혔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거품이 내리는 말레콘과 자동차 그리고 미국에는 없는 자유를 누리며 환호하는 미국인. 아바나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이때 완성되었다. 자동차가 아바나를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확장했다. 길게 이어지는 말레콘을 따라 줄지어 선 건물들은 여러 세대의 건축 양식의 변천사를 진열하듯 이어졌다. 아바나는 하나의 도심이 아닌 여러 도심을 가진 도시라는 특징을 지닌 최초의 도시이기도 했다. 뉴욕이 매서운 겨울바람으로 눈보라 칠 때 쭉 뻗은 늘씬한 대왕 야자나무가 늘어선 백사장과 카리브의 높은 하늘과 열대의 낭만과 휴양이 있는 쿠바, 플랫 수정안이라는 그늘은 미국인들에게 완전한 특권으로 보호해 주었다. 뉴욕에 겨울이 오면 아바나는 미국인으로 가득했다. 아바나 시내에는 전기 모터로 구동되는 전차를 위한 선로가 깔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말과 흑인 마부가 끌던 마차를 탔던 스페인의 식민 시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바나 사람들은 미국 자본의 힘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 스스로 달리는 강철로 만들어진 기계는 도시 한가운데서 미국의 힘을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쿠바는 지금 그 엄청난 기계에 깔린 형국이었다. 

쿠바는 미국의 자본과 기계에 짓눌렸다.

마차 대신 전차를 타고 챙이 긴 순백의 모자를 쓴 ‘모던’한 여인들이 프라도 대로에 즐비한 살롱을 찾아 미국식 커피라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미국인들은 쿠바산 바카르디 럼에 코카콜라를 얼음에 섞은 칵테일을 마셨다. 잔을 부딪힐 때 ‘쿠바 리브레’라는 구호를 함께 말했다. 뉴욕, 보스턴에서 아바나로 출항하는 정기여객선사가 미국 신문의 주요 광고주였고, 여객선이 도착하면 아바나는 매춘의 ‘파라다이스’가 되었다. 스페인 가톨릭 성인 이시도르의 이름을 딴 아바나 만의 선착장 주변은 라이브 섹스 쇼, 포르노 상영관, 뮤직바, 도박장과 매춘업소, 마리화나가 뒤섞인 범죄 소굴이었다. 이때 아바나 시에 등록된 윤락업소만도 338개였다. 백인도 흑인도 물라토도 모든 인종의 여인들이 이곳에서 관광객에게 몸을 서비스했다. 골목마다 나무판으로 가린 집에서 술과 몸을 파는 등록되지 않은 물라토는 그 수를 알 수도 없었다. 카디스의 딸 아바나는 파리, 뉴욕과 함께 세계적인 매춘 도시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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