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말레콘

14. 말레콘

#297 붐

by 조이진

  그렇게까지 흑인을 탄압했건만 자유당 고메스는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설탕 기업의 운영 이사인 메노칼에 패했다. 메노칼의 두 번의 임기 중에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났고 1917년 쿠바는 독일제국에 선전포고했다. 우드로 윌슨이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다고 선언한 바로 다음 날에 메노칼은 그런 선언을 했다. 쿠바 군인들을 태운 배가 미군에 합류해 프랑스 해안에 상륙하기 위해 텍사스로 향했다. 그러나 그 배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났다. 쿠바의 세계대전 참전 선언은 성의 표시 차원의 보여주기식 제스처였다. 총탄에 맞은 쿠바인은 한 명 없었어도 쿠바는 이 전쟁의 승전국이 받을 보상을 벌써 충분히 받았다. 유럽의 대표적인 사탕무 재배지역이었던 프랑스와 벨기에 평원이 참호전 격전지로 변해 포탄이 하늘을 가렸고 농사짓던 농부들이 군인이 되어 삽 대신 총을 들었으니 세계 설탕 공급량은 20% 감소했다. 전쟁터의 병사들에게 설탕은 탄약처럼 전투에 꼭 필요한 보급품이었다. 초콜릿 배급을 기다리던 군인들이 참호에서 죽어가는 동안 설탕 수요는 급상승했고 가격도 치솟았다. 전쟁 전에 파운드당 1.93센트였던 설탕 가격은 전쟁이 시작한 1917년 봄 7.28센트가 되었고 6개월 뒤에는 하늘로 솟구쳐 22.51센트가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던 해 쿠바의 설탕 매출액은 독립 이후 14년간의 매출액을 합한 금액보다 많았고 전쟁 전 2.7%였던 쿠바의 세계 설탕 시장 점유율은 전쟁 첫해 15.4%를 차지했다. 말레콘을 덮치는 바닷물처럼 대서양을 건넌 돈이 쿠바로 쏟아져 흘렀다. 쿠바 역사상 최대 호황이었다. 설탕이 꾸는 단꿈에 쿠바는 흠뻑 젖었다. 설탕 전망이 좋을수록 미국 자본은 공격적으로 쿠바의 토지를 구매하고 플랜테이션을 신설했다. 미국의 초콜릿 재벌 허쉬도 이때 제당 공장에서 항구까지 설탕을 실어 나를 철도 건설에 막대하게 투자했다. 세계가 4년간 전쟁하는 동안 쿠바에는 대형 설탕공장 25개소가 새로 만들어졌다. 5만 명 넘는 쿠바 설탕 생산 업자들은 부채를 모두 갚았고 은행들은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기 위해 경쟁했다. 설탕 사업자들은 부유함과 화려한 삶을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베다도의 고급 주택 단지 지역은 고딕 양식, 이탈리아 르네상스식, 프랑스 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멋지게 지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섰고 전망 좋은 곳이라는 뜻을 가진 미라마르Miramar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미라마르에는 골프장들이 속속 들어섰고, 미국에서 볼 수 없을 만큼 최고급 클럽 하우스를 갖췄다. 미라마르를 관통하는 5번 대로Quinta Avenida는 이름조차 뉴욕 맨해튼의 쇼핑거리 5번가를 본떠 지은 이름이다. 아바나는 고가품이 가장 많이 팔리는 도시로 사치품 소비의 세계 수도로 인식될 정도였다. 쿠바에서는 소규모에 속하는 사탕수수 농장주도 프라도 대로에 줄지어 선 보석상에서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새긴 다이아몬드를 거침없이 쇼핑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아바나 프라도대로는 최고가 자동차로 혼잡한 뉴욕 5번가와 우열을 다투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미국 투자자들은 이 시기 쿠바를 ’살찐 소vacas gordas‘라고 불렀다. ‘캐쉬 카우’라고만 표현하기에는 수익의 규모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아하게는 ’백만장자들의 무도회‘라고도 불렀다. 1920년 5월의 쿠바는 말 그대로 영화였다. 그러나 그해 6월 아바나 대극장에서 일어난 큰 폭발은 대극장을 무너뜨렸고, 영화 같았던 쿠바의 무도회는 이제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극장 안 대통령 전용 좌석에는 메노칼의 장모와 딸이 오페라를 보고 있었다. 생애 마지막 북미 순회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던 엔리코 카루소는 입고 있던 무대의상 그대로 극장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2761E0475428CCFB23.jpeg 테너의 전설 엔리코 카루소도 아바나에서 공연했을 만큼 아바나는 설탕 붐을 누렸다.


“설탕 없이 쿠바는 없다Sin azúcar no hay país.” 설탕에 동기화된 쿠바의 상황을 말해주는 말이다. 설탕 가격이 22.5센트까지 올랐을 때 쿠바 경제는 왕자와 춤을 추는 무도회 같은 호황이었다. 전례 없는 전쟁 특수로 은행들은 막대한 대출을 통제하지 않고 허술한 심사로 경쟁적으로 진행했다. 그러던 가운데 1차 대전이 끝났다. 유럽에서 다시 사탕무가 생산되었고 설탕 가격은 벼락을 맞아 부러진 듯 고꾸라졌다. 절정을 모르던 호황은 종전 7개월 만에 파산으로 돌변했다. 그해 겨울 설탕 가격은 파운드당 4.3센트로 떨어졌고 크리스마스에는 3센트 미만으로 곤두박질쳤다. 무도회는 너무 일찍 끝났고 마법이 풀린 쿠바라는 신데렐라는 드레스 대신 재를 뒤집어쓴 초라한 현실로 바뀌었다. 제당 사업자와 선물 투기꾼들 가운데 채무를 갚을 수 없는 자들이 속출했고 은행은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부실해졌다. 자산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은행은 파산해서 황폐해진 쿠바 금융 시스템은 혼란에 빠졌다. 메노칼은 재임 8년 동안 8억 달러를 빚을 내 집행했다. 그가 대통령궁을 떠날 때 쿠바 재정은 국가 부도 상태에 이르렀다. 1921년 쿠바에서 20개 은행이 문을 닫았고 334개 지점이 폐쇄되었다. 베다도와 미라마르의 부동산 개발업자 중에 자살한 사람이 줄을 이었다. 1920년 겨울, 설탕으로 쌓아 올린 쿠바 경제는 녹아내렸다.


1920년 설탕 붐이 꺼지고 난 뒤 미국은 쿠바 경제 독점에 속도를 더했다. 월스트리트가 뒤를 받친 미국계 은행들은 부도난 제당 공장들을 거침없이 사들여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빚을 갚지 못한 쿠바인 소유 플랜테이션을 미국 자본이 사들였다. 쿠바인이 소유했던 제당 공장 넷 가운데 하나가 이때 뉴욕 자본에 넘어갔고 쿠바에서 생산된 설탕 삼분의 이를 미국인 소유 제당소가 생산했다. 미국의 경제적 지배는 쿠바 사람들이 먹고, 일하고, 옷 입고 다니는 것까지 강한 영향을 끼쳤다. 본격적인 대량 생산 체제에 접어든 미국에 쿠바는 가깝고 보호 장벽도 없는 좋은 자유 무역 시장이었다. 1914년에 미국산 제품 수입액이 7,000만 달러에서 1920년에는 4억 달러로 늘었다. 설탕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신형 기계 장비나 이를 항구까지 실어낼 수 있는 철도와 고속도로 건설 장비 같은 것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또 화려한 옷과 선망하는 가전제품, 라디오, 전화와 엘리베이터, 수세식 변기와 고급 자동차까지 다 미국에서 수입한 것들이었다. 1919년 자료에 따르면 아바나의 인구당 자동차 보유 대수는 뉴욕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쿠바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그 대부분을 소유했다. 철도 노선은 늘어났고 전철과 고속도로 같은 기간 시설이 여기저기서 건설되었다. 오페라 극장이 아닌 필름이 돌아가는 극장도 생겨났고 유성 영화도 상영되었다. 호화로운 장식을 한 로비가 있는 크고 웅장한 호텔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아바나는 쿠바의 다른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어느 도시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앞선 문물을 갖춘 도시였다.


  세계 1차 대전은 또 다른 측면에서 쿠바를 변하게 자극했다. 전쟁 전에 미국인들은 대개 유럽으로 휴가 여행을 떠났다. 전쟁으로 유럽 여행이 금지되자 쿠바가 유럽을 대체하는 휴양지로 떠올랐다. 미국 동부나 유럽의 겨울에 비해 일조량도 많고 따뜻한 쿠바로 향하는 미국 여행자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급격하게 늘었다. 1차 대전 때보다 1929년 증권 대폭락 직전에는 세배나 되었다. 같은 기간에 미국인 백만장자 숫자도 15배로 늘었다. 이들이 쿠바로 오는 관광객이었다. 백만장자들은 아바나를 좋아했다. 영화배우 게리 쿠퍼, 아인슈타인, 코카콜라 회장 같은 유명 인사들이 쿠바에서 겨울을 보냈다는 동정도 뉴스가 되었다. 미국 관광회사는 아바나를 '지구상 최고의 휴양지'라며 신문에 홍보했다. 1차 대전이 미국에서 중산층을 양산했고 주 5일 근무자들이 늘었다. 가처분 소득이 늘고 동시에 여유 시간도 늘었다. 전쟁 전에는 뉴욕에서 기차로 키웨스트로 이동한 다음 아바나로 가는 배로 옮겨 타면 56시간이 걸렸다. 전쟁으로 선박 기술이 발달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뉴욕에서 아바나까지 40시간이면 도착했다. 아직 대중화되지는 않았어도 비행기를 타면 시간은 훨씬 줄었다. 성장세의 기업들은 연말에 새해 사업 전략 구상 회의를 아바나에서 진행해 사세를 과시했고, 아바나 워크숍은 미국 기업의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 갓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도 아바나로 향했다. 쿠바로서는 사탕수수 다음가는 새로운 작물이 생겼다.


1930년대 쿠바 관광을 안내하는 미국 광고. 미국인들에게 아바나는 섹스, 도박, 마약의 천국으로 각인되었다.

  늘어난 소득과 여유 시간, 따뜻하고 이국적인 기후, 그리고 근접성으로 쿠바는 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환경적인 요인보다 쿠바를 미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휴양지로 만들어준 직접적인 자극원은 술이었다. 세계 1차 대전은 미국을 경제 대국에서 군사 대국으로 지위를 올려놓았고 세계의 중심축이 된 미국은 대호황을 맞았다. 주머니 사정이 좋아진 노동자들은 퇴근 후 술독에 빠지는 일이 많았고, 음주로 인한 노동 손실과 안전사고가 크게 늘었고 그것이 정부와 기업에 큰 부담이었다. 그 결국 노동 생산성을 높이려는 기업과 국민 의료 수준을 관리하려는 국가의 이해가 서로 맞아 금주법이 생겨났다. 거기에 경건한 도덕을 중시하는 미국 감리교도들이 음주를 죄악시하고 안티 살롱anti-salon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곡물로 술을 만드는 것은 식품을 낭비하는 비애국적 행위라며 술집에서 술을 팔고 마시는 문화는 앵글로·색슨의 것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만든 악습이니 이들이 훼손하고 오염시킨 미국의 도덕성을 올바로 세우고 앵글로·색슨이 건설한 미국의 발전을 위해 술 음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 미국이 금주법을 시행했다. 금주법은 미국 안에서는 술을 제조하지도, 수입하지도, 운송하지도, 판매하지도 못하게 했다. 이 법으로 부자가 된 마피아들이 나이트클럽 사업을 장악하고 뮤지션들의 고용주가 되었다. 막 노예 신분에서 풀려난 노동자들이 질 낮은 아구아디엔테를 마신 때였던 쿠바에는 금주법 같은 법은 없었다. 금주법 시대 약 15년 동안 쿠바는 레저 관광산업의 첫 번째 황금기를 누렸다.


23804_14887_5125.jpg 미국 영화 <언터처블>은 금주법 시대의 마피아 알 카노네를 다다.

  1920년대에 아바나에 7,000여 술집bar가 영업했다. 대다수는 미국이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을 때 관광객과 함께 아바나로 왔다. 유람선이 아바나 항에 도착하면 미국인들이 많이 찾는 <슬로피 조 바Sloppy Joe's Bar> 주변에는 손님을 유혹하며 서성이는 물라토 여인들도 많았다. 80종이 넘는 칵테일을 파는 이 바를 관광 안내 팸플릿은 “칵테일 천국” 쿠바 섬을 “750마일이나 되는 미국인들의 놀이터”라고 소개했다. 카디스의 역사가 그랬듯이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모이는 항구의 유흥가에서 술에 가장 가까운 이웃은 도박이다. 미국에서는 금주법과 함께 불법이 된 카지노 등 도박업을 메노칼 대통령은 합법화했다. 그리고 메노칼의 가족이 비치 리조트의 카지노에서 인기 있는 도박 스포츠를 운영했다. 아바나에서는 해마다 메이저리그 야구가 끝난 뒤 10일 동안 ’겨울 야구winter ball’라고 부른 미국 프로야구의 오프 시즌 대회가 열렸는데 뉴욕 양키스의 베이브 루스는 출전료로 받은 금액 모두를 도박에서 잃었다. 

아바나에서 매우 유명한 '슬로피 조의 바'. 미국 셀렙들의 교류 장소로 이름 높았다. 지금도 영업 중이다.

술과 도박이 합법인 섬 쿠바. 미국인들의 뇌에서 쿠바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쿠바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이고 무엇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었다. 미국인들에게도 쿠바는 ‘리브레’였다. ‘업무상으로 출장 여행’을 온 미국인들은 이혼 소송당할 염려 없이도 머리에 꽃 장식을 하고 시가를 입에 문 짧은 치마 차림의 물라토 여인과 섹스를 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야한 라이브 쇼를 보기 위해 나이트클럽은 미국인들로 붐볐다. 그곳에서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춤과 리듬을 접했다. 아바나에서 가장 큰 나이트클럽 ‘샤토 마드리드’는 ‘쿠바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에서 식사와 춤을 즐기세요’라는 내용의 광고를 담은 다이렉트 메일을 미국인들에게 보냈다. 무대에서는 거의 알몸인 채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장식을 붙인 수 십 명의 무희들이 몸짓 격한 룸바춤을 추었고, 가수가 직접 부르는 노래를 배경으로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벌거벗은 몸매를 드러냈고, 밴드는 미국식 재즈곡을 연주하는가 하면 캘리포니아에서 유명한 미국 텔레비전 스타도 라이브로 노래했다. 미국 신문에는 “흥겨운 밤! 아바나 최고의 무대 쇼와 열정적이면서도 달콤한 음악과 함께 보내세요. 예쁜 아가씨는 물론이죠”라는 내용을 담은 광고들이 매일 실렸다. 그런 나이트클럽 광고주들이 20여 개가 넘었다. 아름다운 베다도 백사장을 따라 마리아나오Marianao 지역에도 고급 호텔들이 들어섰고 호텔마다 카지노가 들어있었다. 미국 자본은 맨해튼을 본떠서 이곳을 만들었고 맨해튼보다 더 넓게 만들어 근거지를 아예 이 ‘파라다이스’로 옮기려고 했다. 스페인 사람, 다이노, 아프리카인, 중국인 등 모든 인종이 혼혈된 사회 아바나. 입술을 자극하는 망고, 구아바, 파파야, 사포테 같은 숱한 열대과일이 뿜어내는 달고 짙은 향내에 쌓인 클럽에서 만난 혼혈 아가씨들의 바다 내음을 담은 푸른색의 이국적인 눈동자 색깔들.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기후와 여인들의 옷차림새. 여행자의 행동을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가려주는 열대의 숲. 쿠바는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이자 눈에 비치는 것은 마리화나 연기 따라 환각에서 보이는 흐릿한 몽상이었다. 중국인 거주지 치노 바리오에서는 아편이 번져있었고, 코카인은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출장’ 온 미국인들에게 쿠바는 벗은 채로 태어난 아담이자 에덴동산이었다. 집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 볼 수 있는 곳. 뉴욕 자이언트가 11-4로 쿠바 팀에 패했고, 베이브루스마저도 하나의 안타도 치지 못한 곳. 미국인들에게 아바나는 그런 곳이었다. 스페인 시대 뱃사람들이 경험했던 그대로 아바나 항에 배가 들어오면 맨 먼저 창녀들이 마중 나와 미국인들에게 열대의 꽃을 목에 걸어주고 시가를 권했다. 고대 이베리아에서 카디스가 그랬듯이 아바나는 쾌락으로 빚어진 천국이었다. 1920년 플로리다의 키웨스트 섬에서 아바나로 정기 항공 운항 노선이 개설되었다. 쿠바인들은 미국인들의 ‘화장실’이 돼가고 있는 쿠바를 개탄했다.

9631c077177cca34111461f481e64053.jpg 1930년대 아바나의 나이트클럽의 미국인들. 아바나는 미국인들이 선망하는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휴양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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