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 손
손
아바나 말레콘 서쪽 알멘다레스 강Río Almendares를 따라 새로 개발된 베다도, 마리아나오, 미라마르 휴양형 신도시로 미국에서 달러를 들고 온 투자자, 미국인 관광객, 스페인 출신 신흥 부르주아들을 상대로 한 고급 호텔들이 들어섰다. 호텔 프라이비트 백사장 비치파라솔과 나이트클럽은 백인만 출입할 수 있었다. 당연히 쿠바 음악보다는 미국 재즈가 더 많이 연주되었다. 그때 1920년대 미국은 미시시피강을 따라 유행한 재즈에 몰입해 있었다.
바이올린이 리드하는 호텔 전속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모두 미국에서 데려온 백인들이었다. 호텔은 입구부터 흑인들이 들어올 수 없는 인종 분리선이 그어져 있었으므로 미국 흑인 재즈 뮤지션은 아바나에서 연주할 수 없었다. 최고급 호텔은 아닌 작은 호텔에서도 연회장마다 춤을 추는 백인들이 가득했고, 가든파티도 자주 열렸고, 미국 경제의 호황으로 소셜클럽과 나이트클럽, 카바레, 카지노, 레스토랑이 우후죽순으로 늘면서 쿠바의 흑인 뮤지션들도 라이브로 연주할 곳이 많아졌다. 그렇더라도 흰 구름이 산처럼 하늘에 떠 있는 카리브의 쪽빛 바다와 대왕 야자나무 아래 백사장 파라솔 아래에서 연주하는 미국 백인들에 비하면 보수는 형편없었다. 쿠바의 흑인들은 쿠바인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라 미국인들이 듣기에 좋은 음악을 해야 했다. 쿠바 뮤지션들은 프라이비트 비치에서 연주하는 미국에서 온 백인 재즈밴드의 연주를 어깨너머로 들으면서 어떤 점을 흉내 내고 베낄 것인지, 어떤 리듬 마디를 가져올 것인지 골몰했다. 우선 미국 재즈의 악기 구성과 조화를 눈여겨 살폈다. 트럼펫이나 코넷, 트롬본, 색소폰이나 클라리넷과 같은 취주악기가 중심이었던 쿠바 오케스트라에 미국 재즈 밴드의 바이올린, 반조, 피아노, 팀발 그리고 미국식 드럼 세트가 조합되었다. 이 편성에는 아직 손의 핵심 악기인 트레스tres와 봉고bongo는 편성되지 않았다. 미국 재즈밴드와는 상당히 다른 쿠바식 재즈밴드가 아바나에 많아졌다. 7~10개의 악기로 편성한 쿠바 재즈밴드는 쿠바인들이 다니는 카바레와 호텔, 카지노, 소셜클럽에서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 쿠바 스타일의 재즈밴드가 아바나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고 쿠바식 재즈는 아프리카적 음악적 전통이 강한 산티아고까지도 금세 퍼졌다. 재즈가 섞인 쿠바 음악이 새로 나타났다. 1930~40년대 쿠바의 중요한 뮤지션들 중에는 재즈밴드 출신들이 많았다. 아바나에 ‘출장’ 온 미국 재즈밴드 리더 중에는 쿠바 뮤지션에 싼 용역비로 편곡을 맡기기도 했다. 쿠바 음악과 재즈가 쿠바에서 융합했다. 손Son이다.
쿠바에는 아직 스튜디오가 없었으므로 뉴욕의 기술자들이 집음기 같은 장비를 증기선에 실어와 잉글라테라 호텔 같은 곳에서 장비를 차려 놓고 녹음했다. 이동식 스튜디오인 셈이었다. 음반 산업 초기의 곡은 느리고, 음색은 이 곡과 저 곡이 엇비슷하여 단조로웠다. 쿠바 사람들은 가난해 음반을 사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레코드 가게 앞에 서면 최신곡을 들을 수 있었다. 마차도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손은 황금시대를 누렸다. 마차도가 취임한 1925년에 쿠바에서는 처음으로 음악에 전기가 접목되었다. 재래의 집음기 앞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던 소리를 모아 기록하던 녹음방식을 마이크와 앰프를 활용한 전기적 녹음이 대체했다. 흑인 음악인 재즈와 블루스뿐인 미국 음악에서 새롭고 다양한 음악을 배급하고 싶었던 콜롬비아, 빅터 같은 미국 음반사들은 쿠바의 단존과 푼토 과히로, 오페라 가수와 트로바도르들의 다양한 음악을 녹음하고 프린트해 미국 시장에서 팔았다. 그들은 특히 손을 많이 녹음했고, 손은 단박에 미국에서도 크게 인기 있는 장르가 되었다. 1925년을 전후해 쿠바 손 6중주단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미국에서는 특히 푸에르토리코의 스페니쉬 할렘에서 손을 환호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음반을 만들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흑인 음악을 녹음한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마차도의 시대에는 손을 연주하는 6중주단은 쿠바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집단이 되었다. 마차도는 재즈가 섞이기는 했어도 본질에서는 흑인들의 음악이 기반인 손을 장려하면서도 흑인들이 대중 앞에서 드럼을 사용하지는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스틱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두드리는 드럼으로 콘셉트로 보면 아프리카 드럼이지만, 쿠바가 개량해 발명한 봉고 드럼은 1930년대 초반에 쿠바 음악을 상징하는 악기로 자리 잡았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중산층이든 하급 계층이든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두드려 가볍고 높은 음정의 경쾌한 소리를 내는 봉고와 콩가 드럼은 거리에서 또 부두 하역장의 장작불을 빙 둘러싼 노동자들의 룸바춤에서 과감하게 연주되었고 대중화되었다. 철권독재자 마차도라도 이제는 드럼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소셜클럽들은 손 음악을 반겼다. 미 군정기의 쿠바 사회는 미국적 문화를 선망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아프리카적 느낌이 강한 단존은 시대적인 분위기와 어울릴 수 없었다. 손은 단존 스타일을 기본으로 하되 아프리카적 색채를 빼고 대신 미국적 재즈의 선율에다 전통적인 스페인 시어의 운과 율의 규칙을 충실하게 지킨 노랫말을 실어 부르는 스타일의 음악이다. 초기 손은 가사가 단 두 줄이었다. 코로coros라는 한 줄은 짧은 노랫말을 반복했으므로 사람들이 기억하기 쉬웠다. 밴드 멤버가 코로를 부르고 손 가수가 다른 한 구절을 즉흥적으로 지어 불렀다. 코로는 소절과 소절을 서로 나누고 또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후크’는 고대 카디스의 딸들이 춤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8세기 바스크 문학인 재잘과 12세기의 무왓샤샤 시가 형식, 그리고 바흐와 헨델, 비탈리의 바로크 음악의 샤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도 했다. 손의 등장 이전에 쿠바 음악의 주류였던 아프리카 색채가 강한 단존은 이제 옛것이 되었고, 그 자리에 미군과 미국 자본은 미국적 음악을 쿠바 음악에 이식했다. 소셜클럽은 미국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이룬 자기들의 성향과 품위에 손이 잘 어울리고, 또 부르주아 클럽의 격조에도 부합하는 장르라며 환영했다. 손은 클럽에서 남자가 여자를 쫓아다닐 때 도움이 되는 음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남자가 여자를 붙잡았다면 손은 두 남녀를 서로 몸을 당겨 꼬옥 끌어안게 해 주기에는 아주 마땅한 음악이었다. 소셜클럽이 늘어날수록 손 연주자들이 연주할 무대가 늘어났다. 클럽으로서는 손의 음악적 분위기는 회원들의 취향에 맞아 좋지만, 손 연주자 대다수가 흑인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클럽은 연주자들을 장막 뒤로 숨겼다. 비록 장막에 가려진 존재가 되었어도 흑인 연주자들이 받는 보수는 단존을 연주할 때보다 나아졌다. 부두에서 짐을 싣고 내리는 노동자들보다는 몇 배나 많은 보수였다.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소셜클럽은 실력 있는 전속 밴드를 두었고 많은 음식과 술이 있었고 젊고 매력적인 파티걸은 분위기를 돋우다 몸을 뉘었다. 고급 소셜클럽에 전속한 하우스 밴드들은 클럽 회원의 음악 취향을 잘 파악할 수 있었고, 그럴수록 부두 노동자들을 상대로 연주하는 밴드보다 보수의 격차가 커졌다. 소셜클럽의 등장으로 음악은 흑인들이 백인들과 경쟁하지 않고도 쏠쏠한 벌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었다. 손은 1920년 무렵에 6인조 밴드로 처음 연주되었다. 1925년에 전국 손 경연대회가 열렸을 만큼 1920년대 중반부터 그 인기가 쿠바를 뒤덮었다. 라디오 방송에 틀 음악이 필요한 미국의 음반사들이 쿠바 손 밴드를 뉴욕의 전문적인 시설과 장비가 마련된 스튜디오에 데려가 정교하게 녹음했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사들은 그들의 공연을 중계했고 티켓은 빠르게 매진되었다. 트리오 마타모로스라는 손 밴드의 뮤지션들은 뉴욕 틴 팬 앨리에서 녹음을 마치면 택시 운전, 철공소 노무자로 일하며 뉴욕 체류비를 벌었다. 산티아고에서 시가를 말았던 이들이 뉴욕에서 90일 만에 64,000여 장의 앨범을 팔았다. 특히 푸에르토리코 출신들이 많이 사는 뉴욕이 손에 더 열광했다. 미국에서 최초로 유명해진 손 밴드는 섹스테토 하바네로라는 팀이다. 미국 동부 대도시 음반 가게 앞에는 사람들이 손을 듣기 위해 몰려 서 있었다. 냉혈한 독재자 마차도도 미국식 재즈가 융합된 손 음악을 좋아했다. 통치는 냉정할지라도 하위 계층에서 유행한 장르인 손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산테리아를 상징하는 흰색의 옷을 늘 위아래로 입어 가난한 가축 농장 출신인 자기도 흑인 노동자들과 친근한 서민적이고 체온이 있는 보통 사람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 마차도는 정작 아프로쿠바인들의 종교인 산테리아를 금지했고 또 손으로 두드려 연주하는 드럼도 연주를 금했다. 호텔의 무도회장에서는 연주될 수 없었던 봉고였지만, 독재자의 은밀한 연회에서는 늘 봉고 연주자의 손가락이 젖어 있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봉고를 연주하면 구속되었지만, 정부 관리들이 흥청망청하는 파티에서도 봉고를 연주하는 밴드는 보수를 더 받았다. 마차도의 안가 파티에서 연주하는 밴드들이 봉고를 지니고 안가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나면서 드럼을 억세게 죄고 있던 밧줄도 느슨해졌다.
LP에 기록된 손 음악을 틀어주는 라디오 방송국의 인기는 미국에서 폭발적이었다. 중계탑 없이도 쿠바에서 송신한 중파 라디오 신호는 쿠바섬 전체는 물론이고 밤이 되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남부 플로리다와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에서도 수신되었다. 라디오를 탄 손 음악은 쿠바 전체에 스며들었고, 국민 음악이라 불릴 만큼 널리 인기를 얻었다. 쿠바의 라디오 방송은 심지어는 뉴욕에서도 들렸다. 뒷날 미국 음악을 이끌어갈 뉴욕의 10대 소년들도 쿠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손 음악의 애청자들이었다. 그 반대 효과도 있었다. 미국의 방송을 아바나에서도 쉬 들을 수 있었다. 아바나의 신문들은 미국 주요 방송국의 편성표를 날마다 신문에 게재했다. 미국 방송으로는 재즈, 블루스를 들을 수 있었고, 브라질 방송으로는 삼바를 들었다. 쿠바 탱고에서 변형된 새로운 스타일의 아르헨티나 밀롱가 탱고도 그랬다. 아바나에는 북미, 중미, 남미, 카리브의 모든 음악이 라디오라는 뉴미디어를 타 모여들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오르내리는 이 모든 음악에는 흑인들이 주도하는 음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노예에서 풀려난 흑인들이 자유를 표현하기 시작했고, 아프리카의 감성은 예술과 음악 분야에서 새로운 인사이트를 자극해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최하 노동 계급의 유일한 오락거리인 음악이 주류 음악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청동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피카소는 아프리카 원시 미술에 몰두해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그렸다. 라디오 뉴미디어와 음악 그리고 흑인 크리에이티브가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조에 에너지를 붓고 있었다.
백인들의 모더니즘은 검은 황금의 땅 아프리카를 향했다. 이런 음악과 예술 현상은 세계 각국의 문화에 강한 충격을 주었고, 궁극적으로는 1960년대의 흑인 인권 신장 운동 같은 새로운 개념의 의식과 행동을 끌어냈다. 유럽에서야 아프리카는 새로운 관찰 대상이었지만 쿠바에서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내재한 문화였다. 다이노와 아프리카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음계와 싱코페이션과 타악기 리듬은 12음의 빈 스타일로 표현하는 유럽음악과는 다른 음악이다. 가난한 쿠바 음악인들은 흑인 음악에 바탕을 둔 쿠바 음악이 부유한 미국인과 세계인들에게 통할 수 있게끔 보편적 감성을 찾아 융합하려고 노력했다. 손 음악은 그런 쿠바 음악들이 빚어낸 결실이었다. 손이 나타나기 전까지 쿠바의 주류 문화는 백인 엘리트들이 주도해 백인 문화라는 인상이 있었지만, 손이 쿠바의 국민 음악으로 자리를 잡게 되자 ‘쿠바 문화=흑인 문화’라는 이미지를 갖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