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마니마니
마니 마니
리타 몬타네르는 마차도 정권이 몰락한 1930년대 후반까지 쿠바적인 음악을 주도하는 국민 가수로 사랑받았다. 그런 리타가 <땅콩 장수El manisero>를 불렀다. 완벽주의자였던 리타는 거리의 땅콩 장수를 관찰하며 그들의 모든 몸짓 발짓을 기록하고, 땅콩 싸는 종이를 깔때기 모양으로 만들어 사달라고 외치는 모습도, 땅콩 장수가 ‘땅콩 사세요’ 하며 외치는 소리와 억양의 리듬도 익혀 집에 와서 식탁에 땅콩 바구니를 두고 수레를 끄는 땅콩 장수를 연상하며 깔때기 모양으로 종이를 말아 흉내를 내며 오페라 가수답게 아리아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다.
마차도가 집권한 1920년대에 아바나에 유색인이 들어갈 수 있는 전용 술집은 한 곳뿐이었다. 뉴욕도 한 곳뿐이었다. 쿠바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흑인들도 노예 신분에서 해방은 되었어도 극심한 인종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 곳뿐인 흑인 나이트클럽이었지만 루이 암스트롱, 피츠 제럴드, 사라 본 같은 가수들이 재즈의 시대를 열었고 푸에르토리코계 히스패닉들은 할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쿠바 뮤지션들도 간혹 뉴욕에 드나들었다. 레코드 배급사에 음반 녹음하러 온 김에 TV 쇼에도 출연했다. 그들은 할렘에 들러 미국 흑인들의 재즈 음악을 들었고 극장에서 조지 거슈윈의 공연을 보았다. 쿠바 뮤지션들은 할렘의 재즈 밴드를 부러워했다. 그들은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녔고, 두터운 팬층을 지니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들은 미국적 스타일을 최대한 수용하려 했다. 뉴욕에서 직접 밴드를 결성해 뉴욕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밴드를 운영한 쿠바 뮤지션도 있었다. 미국 음악과 쿠바 음악은 주거니 받거니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시기 뉴욕은 흑인 문학과 인권운동으로 세계 모더니즘의 산실이 되었을 때다.
대공황으로 집 없는 실업자들이 거리에서 구걸하는 현실에서 브로드웨이의 유력 투자가마저도 끼니를 걱정할 처지로 떨어졌을 만큼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위축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엔터테인먼트를 원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즐거움을 찾아 위로받고 기뻐지고 싶은 것이 삶이고 사람이다. 엔터테인먼트의 근원은 이전과 다른 낯섦, 그것이 주는 새로움에 있다. 뉴욕 스페니쉬 할렘 엘 바리오에서는 라틴계 사람들을 위한 뮤지컬 버라이어티 쇼가 매주 열렸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갖는 성격을 보여주듯이 이 쇼는 쿠바 밴드를 포함해 여러 나라 출신의 라틴 아메리카 뮤지션들이 모여 공연했다. 스페인어로 이뤄지는 공연장은 미국이라는 ‘아메리카’와 중남미와 카리브라는 ‘또 하나의 아메리카’가 뒤섞이는 용광로였다. 쿠바의 <땅콩 장수>가 오기 전까지 뉴욕은 그들의 음악을 통칭해서 탱고라고 불렀다. 그러다 변화가 생겼다. 1930년에 스페인어 신문에 이런 광고가 실렸다.
아바나가 뉴욕에 오다!
룸바
브로드웨이 70번가에서
아바나 로열 룸바 오케스트라가
룸바와 단존, 탱고를 연주합니다.
무대에 조명이 비추자 땅콩 장수 의상을 입은 여가수가 땅콩 파는 수레를 끌고 들어오더니 객석을 향해 땅콩을 뿌리며 “마니~ 마니~”하며 <땅콩 장수>를 불렀다. 이 공연이 크게 주목받자 경제침체로 일정이 텅 비어있던 브로드웨이가 곧바로 이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브로드웨이 공연답게 번쩍하고 화려한 조명이 들어오자 가수가 땅콩 수레를 끌고 들어오며 ‘마니 마니maníííííí~ maníííííí~’를 외치며 입장했다. 할렘 공연 때보다 훨씬 많은 땅콩을 객석에 뿌렸다. 미와 솔 두 음계로 이루어진 리듬 마디는 오페라 아리아의 소프라노 창법으로 단순하지만 귀에 확 박히고 따라 하기 쉬워 중독성이 강했다. 쏟아지는 땅콩을 받으려 관객들이 일어섰고, 일어선 관객들은 환호하고 리듬에 맞춰 손뼉을 치고 몸을 흔들었다. 흑인과 백인, 물라토들이 뒤섞인 단원들. 트럼펫, 색소폰 같은 유럽 악기와 마라카스, 클라베, 기러 같은 다이노 악기. 봉고와 콩가, 팀발레스의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의 악기가 뒤섞인 오케스트라. 여러 피부색의 단원과 처음 보고 또 들어보는 악기들이 만드는 기묘한 리듬과 멜로디와 사운드. 미국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노래와 무대 프레젠테이션과 새로운 쿠바 퍼커션 리듬으로 <땅콩 장수>는 무대를 찢어 놓을 만큼 관객들의 반응이 폭발했고 대공황의 깊은 고통의 한가운데 있었던 미국에서 이 노래는 크게 히트했다. 이 공연으로 쿠바의 룸바 뮤지션들은 미국의 라디오 방송에 자주 출연해 노래했고, 유성 영화가 막 발명되었을 때 유성 영화의 특징을 살려 할리우드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룸바 음악과 춤을 추는 뮤지컬 영화 10여 편을 만들어냈다. 뉴욕에서 가장 큰 댄스교습소는 룸바 교습이 매출의 60%를 차지했다. 소셜클럽에서도, 댄스 파티장에서도 오직 룸바를 추었다. 같은 시기 파리도 쿠바 음악에 빠졌다. 100년 전부터 흑인들이 콤파르사에서 불렀던 노래를 주제부로 가져와 만든 <땅콩 장수>가 세계 음악계에 ‘룸바’ 붐을 일으켰다. 콜롬비아 레코드가 녹음한 이 곡을 빅터 레코드도 다른 가수와 녹음했다. 루이암스트롱을 비롯해 200명이 넘는 가수들이 녹음하는 등 이 곡은 20세기에 가장 많이 불린 곡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유럽을 거쳐 일본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유럽 음악의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음악을 찾던 미국 뮤지션들에게 쿠바 음악은 새로운 영감의 빛이었다. 이 곡의 곡조는 여러 댄스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에 스며들었고, 미국의 음반사들이 아예 아바나에 사무소를 열고 쿠바 음악가들과 제작 배급하는 계약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대공황 시기였지만 많은 수의 쿠바 음악이 리코딩되었고, 많은 수의 쿠바 뮤지션들이 미국 재즈에서 받은 영감을 융합한 새로운 음악을 미국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미국의 음반 제작자들과 방송인들에게 장르의 명칭은 무척 중요한 사안이었다. 재즈, 블루스, 트로트, 발라드, 탱고, 왈츠처럼 음악의 특징을 알려주는 장르 이름은 음악을 소개하고 음반을 마케팅할 때 중요했다. 그런 그들에게 손Son이라는 장르 명칭은 마음에 들 수 없었다. 영어 단어 ‘아들son’과 발음도 철자도 같았기 때문이다. 신나는 음악이라고 소개하면서 그 음악이 ‘아들’이라니! 라디오 진행자는 ‘자, 쿠바에서 지금 유행하는 신나는 '아들'이라는 음악을 들려드립니다’라고 말해야 했고, 신문은 쿠바의 인기 ‘아들’ 밴드가 뉴욕 공연에서 크게 성공했다는 기사를 써야 했다. ‘손’ 발음과 ‘아들’이라는 뜻은 사람을 춤추게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룸바’라면 어떤가. ‘룸바’는 아프리카적인 이국적 느낌이 진했고, 발음하는 혀가 구르며 내는 소리는 춤을 연상하게 했다. 이 보다 좋은 이름이 또 있을까. 룸바가 19세기 스페인 제국주의 시대 설탕 플랜테이션의 흑인 노예들이 산테리아 종교의식으로 추던 춤이었다는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rumba’에 ‘h’를 넣어 ‘rhumba’라는 단어를 주조했다. 주조된 룸바는 쿠바 흑인들의 춤 명칭 룸바rumba와 같은 발음을 유지하면서도 표기상으로도 구별할 수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미국에서 룸바는 ‘rumba’든 ‘rhumba’든 모든 쿠바 댄스 음악을 묶어 부르는 이름으로 통했고, 손 뿐만 아니라 과라차, 과히로, 볼레로, 차차차, 맘보 같은 수많은 쿠바 장르들도 몽땅 하나의 부대 속으로 집어넣더니 모두 룸바라고 퉁쳤다. LP의 그루브를 바늘이 긁어 나오는 끈질기게 반복되는 리듬 패턴이 특징인 쿠바의 손이 미국 대중들에게 리듬을 타고 그루브를 느끼어 몸을 흔들어 ‘스윙’하게 했다. 미국인들은 손이 유행한 1930년대부터 비로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이 춤을 배운 리듬은 쿠바가 1920년대에 낳은 쿠바의 아들 ‘손Son’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라틴 음악’ 또는 ‘라틴 댄스’라고 표현한 춤과 음악을 ‘룸바Rhumba’라고 바꿔 불렀다. 세계 최강국이 된 미디어 사회 미국이 정한 새로운 규칙은 유럽을 타고 일본을 지나 한국까지 퍼졌다. 쿠바가 땅콩을 수출하는 나라는 아니었지만, 리타 몬타네르가 1928년 대공황의 입구에서 부른 쿠바의 <땅콩 장수>는 세계에 땅콩 대신 룸바 열풍을 일으킨 쿠바의 아들 ‘손Son’이었다.
1930년 쿠바 볼레로 <초록빛 그대 눈동자Aquellos ojos verdes>가 발표되었고 이 곡을 주제부로 써서 미국인 브로드웨이 작곡가 콜 포터가 느린 ‘룸바’-사실은 손- 형식의 <Begin the Beguine>을 작곡했다. 이 곡은 미국에서 스윙 음악의 시대를 열었고, 베니 굿맨 밴드 같은 빅 밴드의 스윙 재즈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하는 토대가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 피츠 제랄드 같은 뮤지션들이 빅 밴드에서 활동하던 이때가 미국 음악의 황금시대였다. 쿠바 음악의 황금시대와 미국 음악의 황금시대는 일치했다. <초록빛 그대 눈동자>는 쿠바 볼레로는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최초의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