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100일
100일 혁명
아바나대학의 교수로서 학생운동을 지지하고 마차도 독재에 반대 투쟁하느라 옥에 갇힌 학생들을 뒷바라지했던 그라우가 1933년 군사쿠데타의 결과로 대통령 궁 테라스에서 대규모 군중 앞에서 대통령 취임 선언을 했다. 플랫 수정안이 포함되어 있는 현행 쿠바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선언을 거부한 그는 군중을 향해 그의 팔을 뻗어서 발코니 아래 모인 쿠바 민중들과 동맹하겠다고 맹세함으로써 취임 선언을 대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라우에게 다가와 지금 워싱턴에서 전화가 와있다고 말을 전하자 그는 군중을 향해 큰 목소리로 “워싱턴에 이대로 전하시오. 나는 지금 우리 쿠바 국민과 함께 있소이다. 나는 우리 쿠바인들을 위해 있어야 할 곳에 있겠소이다.” 쿠바 국민의 함성이 말레콘을 넘어 퍼졌다. 미국의 개입이나 은밀한 영향력 없이 정권이 통치하는 최초의 쿠바 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라우는 취임식에서 플랫 수정안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미국에 사전 협의도, 심지어 통보도 하지 않았다. 많은 정치인들이 플랫 수정안을 폐기해야 한다고 웅변은 했어도 이렇게 대통령 궁의 발코니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한 적은 없었다.
그라우가 통치한 100일 동안 진정한 혁명이 진행되었다. 총으로 무장한 학생운동 출신 급진 좌파 진영 인사들로 구성한 혁명 정권은 최저 임금제를 도입하고 공공요금을 인하하더니 쿠바 정부의 정책에 불복종하는 자파라 제당, 전력회사 등 미국 소유의 주요 세 기업을 국유화했다. 미국 대사는 지켜볼 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것은 쿠바에 엄연히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미국의 힘에 정면으로 충돌하겠다는 것으로 굉장히 중요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가 오고 있음을 의미한 조치였다. 이런 조치를 이끌었던 각료는 “반제국주의적 조치가 아니라면 그것은 혁명적이라 할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의 말 대로 그라우 내각은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에 반하는 조치를 이어갔다. 쿠바 군대는 미국과 군사협력을 중단한 대신 멕시코 군대와 합동훈련을 개시했다. 우루과이에서 열린 범미 회의Pan America Congress에 파견된 쿠바 대표단은 모든 라틴 아메리카 국가는 스스로 주권을 지켜야 하며 미국 등 다른 나라가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내정에 개입하는 행위를 비난하고 특히 미국의 플랫 수정안을 강하게 비난했다. 마차도가 집권했을 때 쿨리지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 아바나 범미회의 때와는 판이한 입장이었다. 이 100일 동안 쿠바에서 진짜 혁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가를 철권으로 억압 통치한 마차도가 떠난 공백을 노동자들의 분출된 요구가 채웠다. 특히 제당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요구가 뜨겁게 분출했다. 보통 120일 동안 수확하는 했지만 그라우가 집권한 1933년에는 수확일을 66일로 줄이고 또 설탕 경작지를 제한하여 감산함으로써 설탕 가격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수확일이 줄어드니 지급된 임금도 급격히 줄었다. 상사의 반란 다음날에는 차파라 제당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했다. 차파라의 관리자들은 급히 마련한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도피했다. 이틀 뒤 까마궤이에서는 5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마체테와 몽둥이를 휘둘러 제당 공장을 점거했다. 반란 한 달 만에 노동자들이 36개소의 제당 공장을 점거했고 대다수는 소비에트를 조직해 공장을 가동했다. 어느 지역에서는 ‘기동 여단’이 이 공장 저 공장을 다니며 공장별 지역별 소비에트 조직을 세우는 일을 도왔다. 수 천명의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기차를 징발해 설탕 플랜테이션이 있는 역마다 내려 제당 공장을 위협했다. 어느 제당소는 몰려오는 노동자들에게 대표단을 뽑아 협상장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감시 타워에서 내려다보니 셀 수도 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몰려오고 있었으므로 얼른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이 감시탑을 점거했다. 노예 노동을 감시했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상징인 감시탑에 두 개의 깃발이 내걸렸다. 하나는 쿠바 공화국의 국기였고, 다른 하나는 붉은 깃발이었다. 두 깃발을 내걸고는 먼저 쿠바의 국가를 부르고 다음으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찬가를 불렀다. 그리고 노동을 배정하고 생산 계획을 세웠다. 생산한 설탕을 팔아 노동자들에 임금을 지급했고, 부엌에서 수프를 끓여 배급했다. 농사에 필요한 도구도 땅도 모두 그렇게 배급했다. 어떤 제당소에서는 노동자들이 학교를 세워 직접 교육하고, 법원을 설치해 판결하고, 자위단은 제당소 간부를 체포해 판결했다. 체포된 자 가운데는 미국인도 있었다. 제당소 운영 책임자들은 노동자들의 막사에서 함께 자고 같은 음식을 먹었다. 이런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설탕 경제의 붕괴 이후 쏟아져 나온 여러 사회적 의제에 대해 그라우 정부의 개혁에 더욱 속도를 내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이제 쿠바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세 번째 축인 미국이 남았다. 미국은 쿠바를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이 또 군사적으로 개입해 세스페데스를 복위시킬 수도 있었다. 상사의 반란에 끼지 못한 최고위 장교들이 나시오날 호텔에 앉았다. 맞은편 좌석에는 단 몇 분이면 나시오날 호텔에 도착할 수 있는 미 대사관에서 온 대사가 앉아 있었다. 대공황 때 오픈한 지 3년 갓 지난 나시오날 호텔이 처음으로 북적였고 호텔이 새로운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의 본부가 되었다. 바티스타가 호텔에 공급하는 전력선을 잘랐다. 그들은 미국의 군사 개입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실제로 미국 대사는 워싱턴에 일단의 군대를 상륙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45분 뒤에는 1천 명, 이틀 뒤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아바나와 쿠바 여러 주요 항구 도시에 상륙시켜 달라고 수정 요청했다. 상사의 반란이 일어난 3일 뒤 미국 전함 인디애나폴리스호가 아바나 항에 들어왔고 그 배에는 미 해군 장관이 승선해 있었다. 아바나만의 입구 모로 요새를 지나 이 큰 전함이 들어오는 것을 아바나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많은 군중들이 벌건 대낮에 아바나에 들어오는 이 큰 전함을 웅성대며 지켜보았다. 모로 요새 옆 언덕 라 카바냐에는 대오를 이룬 포신이 미국 전함을 겨냥했다. 지금까지 사실상 쿠바를 통치해 온 미국으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 시각, 무장한 쿠바 병력이 미국 대사가 회의하고 있는 나시오날 호텔을 포위했다. 29척의 미 해군함정들은 쿠바 주요 항구 도시 주변 해역을 순찰하고 있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호텔 직원들은 모두 떠났고 감금된 채 처음으로 제 손으로 밥 하고 빨래해 본 쿠바 고위 장교들은 미국이 개입해 복권해 줄 날을 기다렸지만 그들의 판단은 빗나갔다. 미 해병대 대신 바티스타가 보낸 군인들이 호텔을 습격해 하루 종일 총격전이 벌어졌다. 낮에는 호텔에 대포까지 쏘았다. 100여 명이 사망했다. 화려한 나시오날 호텔은 벽지까지 약탈당해 벌거숭이가 되었다. 상사의 반란으로 새로 들어선 정부를 위협하는 세력을 일거에 제거한 이 사건으로 바티스타는 혁명의 주도 세력임을 확실히 했다. 이틀 뒤 미국 대사가 바티스타를 면담했다. 그리고 미국은 바티스타를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대사의 말은 묘했다. ‘쿠바를 위해’가 아니라 ‘바티스타를 위해’ 지원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 징표로 미국은 그라우 정권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 미국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라틴 아메리카와 관계를 수정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30년 동안에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 벌써 30여 차례나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루스벨트는 돈도 많이 들고 인적 희생도 따르는 군사 개입이 효과도 그다지 좋지 않은 데다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반미감정이 높아지고 있었으므로 외교 수단에서 제외하고자 했다. 루스벨트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정책 기조를 아버지 루스벨트가 했던 ‘몽둥이big stick’ 정책에서 ‘좋은 이웃good neighbor’ 정책으로 바꿨다. 루스벨트는 이번 쿠바 상황에서는 군사적 개입을 시도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군사 위협보다 진화된 정교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이웃을 통제하기로 했다. 새로운 쿠바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새로운 수단으로 삼았다. 새 쿠바 정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쿠바 정권이 미국인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꼴이 된다는 논리였다. 그것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라우 정권에 대한 미국의 인정 거부는 쿠바 사회에 큰 불안정과 불확실성과 분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었다. 또 미국이 거부하면 다른 나라들도 새 쿠바 정권을 인정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라우 정권에 반대하는 쿠바 내 세력이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이 될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 기업들은 납세를 거부하고, 새 최저 임금제에 따른 임금을 지급하지도 않고, 파업 중인 노동단체와 임금 교섭도 진행하지 않는 등 정부의 새 입법에 공개적으로 불복했다. 그라우 정권은 미국이 인정한 정부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쿠바에서는 세금을 낼 수 있는 기업 대다수는 미국계 기업이었다. 노동자들은 정부를 더 압박해야 기업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모든 골목에서 쿠바인들인 삼삼오오 오직 정치 이야기만 논쟁했고 파업과 혁명에 대한 요구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라우 정권은 혁명적이었다. 그렇게 불처럼 뜨거운 혁명은 내각을 분열하게 했다. 그라우 자신은 사회 개혁주의자였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라우는 미국에 대해 정치적으로 독립된 공화국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할 헌법을 다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것을 통해 경제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라우는 플랫 수정안 폐기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그라우는 개혁을 원만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내각이 과격한 입법으로 저항에 맞닥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완급 조절을 통해 개혁 일정을 관리하고자 했다. 지나친 저항은 미국 정부가 그라우 정권을 인정하지 않게 하는 명분이 될 것이고 그래서는 그라우 정권이 버틸 수 없게 될 터였다. 그러나 과격한 젊은 좌파 각료들은 경제적 변혁 없이 정치적 독립은 성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 차이가 내각을 근본에서 균열하게 했다. 그라우가 직면한 것은 젊은 좌파 장관들과의 분열만이 아니었다. 더 큰 위협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혁명적이기는 했지만, 그라우 정권은 상사들의 반란으로 넘어온 권력이었다. 상사들이 그라우를 권좌에 앉혀주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라우 내각은 노동자의 관점에서 정책을 입안했지만, 바티스타는 뒤에서 고용자의 편이었다. 혁명의 두 축인 쿠데타 군부 세력과 그라우 내각은 갈라졌다. 한쪽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고, 다른 한쪽은 급진적인 내각에 비해 지나치게 보수적이었다. 그라우 내각을 위협하는 가장 불길한 징조는 그것이었다.
미국의 수술칼이 이 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미국은 쿠바 상황에 개입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보았다. 미국인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했다는 것은 쿠바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제약하려는 의도이자 노골적인 공산주의적 조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의 목표는 제당 공장을 원상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갑작스럽게 쿠바 주재 대사를 교체했다. 신임 쿠바 대사 제퍼슨 카페리는 이전 미국 대사보다도 더 분명하게 그라우 정권을 부정했다. 미국 대사는 바티스타를 사적으로 은밀하게 자주 만났고, 그라우 정권은 미국이 인정해 줄 어떤 조건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속삭이면서 이 혼란한 쿠바를 대표할 유일한 인물은 당신이라고 부추겼다. 또 미국은 새 정권을 원하고 쿠바 경제를 쥔 미국 기업들도 그를 도울 것이라고 했다. 바티스타는 군이 다시 나서 외국인 선동세력을 쫓아내고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고, 기업 소유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필요하다면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군대를 동원하겠다고 미국 대사에게 대답했다. 바티스타는 ‘사탕수수를 수확하지 않으면 피가 흐를 것’이라고도 경고했다. 실제로 바티스타 군대는 상사의 반란이 있은 뒤부터 한 달가량 제당 공장을 점거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발포했다. 이날 발포로 노동자 40여 명이 죽었다. 쿠바 전국에서 이런 일이 거듭되었다. 바티스타가 그라우를 만났다. 미국은 당신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하야하라고 권고했다. 쿠바에서 미국이 인정하지 않는 정부란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은 확실했다. 이틀 뒤 그라우가 하야한다고 발표했다. 그라우의 혁명 정책들은 127일 만에 멈추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때를 100일 혁명 정부라고 부른다. 하야 닷새 뒤 바티스타의 부하이자 미국 대사가 동의해 준 카를로스 멘디에타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미국은 새로운 쿠바 정권을 즉시 인정했다. 그라우는 마이애미로 거점을 옮겼고 쿠바 정통당Authentico를 세웠다. 이때부터 마이애미는 쿠바 정객들의 망명지로써 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라우 혁명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 좌절이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에 연료가 되었고, 피델 혁명의 핵심 세력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1933년 혁명은 그것을 남긴 미완의 혁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