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드럼
드럼
바티스타는 군인을 시골 벽지로 내려보내 교육과 대민 봉사에 나서게 했다. 1937년에는 “3개년 계획”을 세워 사회보험인 건강보험을 만들었고,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 소유를 제한했고, 제당 공장의 소유자와 노동자가 이익을 나누게 하고, 학교를 세우고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이 3개년 계획이 어찌나 과감했는지 300년 계획이라고 비웃는 자들도 있었다. 바티스타는 국토를 잘게 나눠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농부들에게 무상으로 배분했고 정부가 주택 임대료 상한가에 직접 개입하고 주택담보 대출 이율을 낮췄다. 그라우 정권 못지않게 좌파적인 정책으로 국민의 인기가 솟구쳤고, 자신감을 얻은 바티스타는 심지어 공산당도 합법화했고, 노동조합 설립 규제도 풀었다. 그 결과 공산당이 주도하는 운수노동조합이 바티스타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을 정도였다. 바티스타는 또 흑인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단으로 흑인들의 영혼이라는 드럼 소리를 해방했다. 스페인이 지배했을 때부터 흑인 폭동의 신호로 간주하여 연주가 금지된 드럼도 자유를 찾아 쿠바 음악에 아프리카의 냄새를 음악에 불러낼 수 있게 되었다. 정적은 일찌감치 제거해 두었고,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개혁적인 인물들도 확보했다. 미국은 늘 자신의 든든한 정치적 뒷배임을 늘 확인하고 있었다. 속기사가 아닌 정치인 바티스타가 쿠바 최고의 정치인이었던 시대였다. 호사가들은 이 시기를 팍스 바티스티아나라고 불렀다.
야심가에게 플랫 수정안이 남았다. 급진적인 그라우 정권이라도 국민에게 새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약속만 했지, 시도 조차하지 못했다. 아무도 하지 못한 것을 바티스타가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투옥된 정적들을 모두 사면 석방했다. 외국으로 도피나 망명한 정치인들도 모두 귀국할 수 있게 허용했다. 그리고 제헌의회에 나갈 국민대표를 말 그대로 민주적으로 선출하게 했고, 각 계층의 대표성을 띤 모든 정파가 회의에 참여했다. 맨 먼저 1903년의 미국의 감독 아래 운영된 제헌 회의에 참석했었던 대표자가 모두 발언을 시작했다. 진보와 보수, 개혁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 반대론자, 설탕 기업 소유자와 노동자, 지주와 농민, 낫을 만드는 대장장이와 벽돌공도 회의에 참석했다. 안토니오 마세오 장군의 딸도 있었고, 라디오 프로그램의 인기 진행자도 있었다. 전직 대통령 그라우도 제헌의회에 참석해 발언했다. 흑인과 백인과 물라토, 페미니스트와 안티 페미니스트도 자유롭게 발언하고 조항마다 찬반투표를 했다. 모든 회의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었다. 아바나 시민들은 카피톨리오 광장에 모여서, 라디오가 없는 시골 마을에는 마을 광장에 걸린 확성기를 통해 모든 대표자의 발언을 들었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최선을 다해 진지한 태도로 국가의 기반이 될 법을 토의했다. 미군 점령기에 미국이 만들어준 헌법이 아닌, 쿠바가 직접 작성한 진정한 의미의 헌법이 최초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내용도 무척 진보적이었다. 토지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을 규정하고, 최저 임금제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제, 노동조합 결성과 파업의 권리, 사회보장제와 하루 8시간 노동과 유급 휴가제를 명시했다.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것도 중요한 내용이었다. 대규모 토지 소유를 불법화하고, 소유할 수 있는 사유 재산의 최대치를 정해 초과하지 않게 했다. 이것은 쿠바에 투자한 미국인의 권리에 타격을 주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은 특히 “하위법은 외국인과 외국 기업의 토지 취득과 소유를 엄격히 제한해야 하고, 토지를 쿠바인 소유로 전환할 수 있는 수단이 적용되어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역사가들은 1933년 혁명의 요구사항을 집대성한 1940년의 이 쿠바 헌법은 멕시코가 혁명에 성공한 뒤 수립한 1917년 헌법에 매우 가깝고, 멕시코 헌법의 바탕인 정치적, 개인적 권리에다 사회적 권리라는 개념까지 새로 보강해 작성한 진보적인 헌법이라고 평가한다.
1940년의 선거는 공정하고 자유롭게 치러졌다. 바티스타는 인종차별 금지 정책으로 흑인들의 지지를 끌어냈고, 급진 좌파적인 그라우의 정책도 이어받아 공산주의자들까지도 그를 지지했다. 또 상사들의 반란 이후로 사실상 쿠바를 통치해 온 경륜도 있었으므로 그는 대중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스스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공포된 새 헌법으로 쿠바는 새로운 공화국으로 다시 설 것처럼 보였고, 사회 정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도 꽃 필 것으로 기대하게 했다. 대통령에 출마했던 후보자들도 하나같이 헌법에 담긴 정신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인디오El Indio’라는 별명의 잘생긴 메스티소 바티스타의 전면 등장으로 이제 쿠바에 ‘안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바티스타의 군사독재가 이끈 ‘안정’은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으로 전복될 때까지 20년간 지속되었다. 새 헌법이 공표되고 발효된 날 바티스타가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시작했다. 이 날은 콜럼버스를 창끝으로 유럽 식민주의가 상륙한 지 448년 만에 쿠바 섬에 처음으로 외세의 지배와 감독 없이, 스스로 수립한 헌법에 따라 권력이 탄생한 날이었다. 플랫 수정안이 없는 새로운 헌법을 수호하겠다며 바티스타가 대통령 취임을 선언하는 순간은 쿠바가 또 다른 아메리카인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헌법은 그 자체로는 강제력을 갖지 못했다. 헌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하위법이 뒤따라야 했다. 그런 하위법들이 뒤따라 입법되기를 쿠바인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역사가들은 1940년의 헌법은 매우 이상적이고 선구적이었지만 단지 미래에 달성하고자 하는 국가 목표와 기본의제를 담뿍 적어놓은 글귀들일뿐이라고 평가했다. 강제력과 구속력을 갖지는 못했을지라도 이 헌법은 쿠바 정치에 엄존하는 축으로 작용할 힘은 지녔다. 모든 쿠바 국민이 참여하고 의견을 모아 이 헌법을 만들었고 또 국민이 이 헌법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킬 하위법을 목을 뽑아 기다리던 쿠바 국민은 모든 정치 토론을 헌법을 기준으로 했다. 선거 때면 정치인들도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요구할 때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얼마나 헌법에 부합하는지, 또 헌법 이념을 입법과 정책으로 실현하려 하는지를 호소하고 표를 구했다. 12년 뒤 어느 젊은 정치인도 쿠바인들이 그토록 기다린 헌법 정신의 실현을 구호로 외치며 쿠바 역사에 등장했다. 피델 카스트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