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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2. 2024

15. 그란마

#320 콜롬비아

  미국은 보고타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세계 전복 기도 행위라고 비난했고, CIA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모스크바가 조종했다고 했다. 그러나 사건의 전개 과정을 되짚어 보면 모스크바가 개입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보고타 사태는 유력한 대선 후보를 암살한 일로 촉발되었다. 그리고 이에 항의하는 민중들에게 국가가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탄압을 가한 것이 폭력 사태의 원인이었다. 미국 정계가 이 사건을 계기로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은 앞으로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정권을 인정해 줄 것이라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군부가 CIA의 묵인 아래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기도를 막기 위해 나섰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미국이 군부정권을 인정해 줄 명분이 되었다. 미국이 이 결의안을 채택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잇달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베네수엘라를 시작으로 페루, 콜롬비아, 볼리비아, 아이티가 그랬고 쿠바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났다. 반공주의로 포장한 미국의 결의안 하나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가 겪게 될 비극을 불러내고 있었다.

콜롬비아

   콜롬비아는 「폭력의 시대La Violencia」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빠져들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정권은 강경 극우화했고,그에 영향을 받은 콜롬비아 집권 보수당도 더욱 대담하게 정국을 운영했다. 경찰은 반정부 인사들을 재판 없이 사살했고,콜롬비아는 사실상 내전과 다름없는 상태로 빠져들었다. 콜롬비아 학생들이 피델 카스트로를 1950년에 있을 콜롬비아 대선에 나갈 진보당 후보 가이탄Gaitán에게 소개했다.

콜롬비아 야당 지도자 가이탄은 피델의 눈앞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가이탄은 대중을 사로잡는 외모와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십, 선동적인 스타일로 탁월한 대중 연설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특히 대중들에게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그의 어법은 피델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가이탄은 “나는 한 인간이 아니라, 한 명의 민중으로서….”라며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콜롬비아 정부의 폭력적 방법에 비폭력 침묵시위로 맞섬으로써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시위를 감동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침묵시위를 하는 군중을 정부가 폭력으로 진압한 이 시기가 「폭력의 시대」였다. 콜롬비아 안팎에서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이변이 없다면 가이탄이 선출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피델은 가이탄과 학생 대표 회의를 조직할 계획을 협의하기 위해 약속 장소에 있었다. 그때 총을 든 괴한이 나타나 가이탄을 쏘았다. 피델의 눈앞에서 가이탄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가이탄 살해로 콜롬비아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보수당 정권의 소행이라는 확증은 없었지만, 지지자들은 집권자의 소행으로 보았다. 암살자는 군중들에게 붙잡혀 대통령 궁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대통령 궁 안으로 돌멩이와 벽돌이 날아 들어갔다. 수천 명이던 군중이 금세 수만 명으로 늘어났고 손에든 몽둥이는 마체테로 바뀌었다. 사냥총이든 장총이든 대통령 궁을 향해 쏘았다. 대통령 궁을 지키는 군인들이 군중을 향해 소총을 쏘았고 기관총을 걸어 방아쇠를 길게 잡아당겼다. 끝없이 행진하던 군중들이 군인들 앞에서 쓰러졌고 주검과 피를 넘어 산 자들이 나갔다. 죽음을 위한 행진이었다. 큰 폭발음과 함께 포탄이 광장의 군중들 속에서 터졌다. 탱크는 불을 뿜기도 했고 무쇠 궤도는 사람을 깔아 짓이겼다. 카리브의 햇볕은 뜨거웠고 검은 피가 대지에 눌어붙었다. 지옥의 풍경이었다.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고 피에 주린 야수들에게 몸뚱이를 제물로 바쳤다. 군중들이 전차를 세워 뒤집고 불태워 바리케이드로 삼았다. 참혹한 장면을 지켜보던 경찰들이 마주 선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제복을 벗어 던지고 군중 속으로 섞였다. 그런 소요 사태가 며칠간 이어졌다. 대규모의 시민이 죽음을 각오하고 장기적으로 저항을 이어갔으므로 충분히 민중이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투쟁이었지만, 결국은 패배했다. 시위를 주도하는 구심점도 없었고, 시위는 점차 폭력과 약탈로 변질하고 말았다. 보고타시 곳곳이 불타 잿더미로 변해갔다. 군인들은 도시로 들어가는 길을 모두 막았고, 쌓인 시신들이 썩었다. 그때 3,000여 명의 시민들이 죽었으리라 추정되었다. 스페인에 독립한 지 140년이나 지난 세월 동안 콜롬비아는 늘 내전과 다름없이 늘 불타고 있었지만, 콜롬비아의 진짜 「폭력의 시기」는 이제부터였다. 이날부터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이날 이후 5년 동안 최소 20만 명이 넘는 콜롬비아 사람들이 서로에게 죽임을 당했다. 같은 나라 같은 국민이라고 서로 믿지 못했다. 다만 증오가 증오를, 복수가 복수를 불렀다. 극단적 우익 정권에 강경하게 저항하는 세력들은 이 사건과 상황을 계기로 공산 혁명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폭력의 시대'에 빠진 콜롬비아

   피델 카스트로는 현장에서 함께 싸웠고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내가 마치 돈키호테가 된 것처럼, 내가 마치 프랑스 혁명의 한가운데서 군중들에게 혁명에 가담하자고 웅변하고 있는 자 같았다”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피델은 거기서 조직화 되지 못한 저항은 혁명이 아니라 많은 희생만을 남긴다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은 사건 5일째 되는 날에 쿠바 대사관이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콜롬비아를 빠져나왔다. 비행기 안에는 이제 혁명의 현실을 확실히 깨우친 젊은 쿠바 혁명 전사들이 타고 있었다. 카리브의 눈부신 하늘을 내다보는 피델과 일행들은 쿠바를 어떻게 무장 혁명할지 구상하기 시작했다. 보고타 소요 사태는 전 세계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쿠바는 바로 옆 나라인 콜롬비아의 뉴스를 상세하게 전했다. 신문 1면에는 훤칠하고 잘생긴 피델의 사진이 거의 매일 실렸다. 피델 카스트로라는 젊은이가 그곳에 쿠바 대표이자 라틴 아메리카 대학생들의 대표자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민중들에게 알려졌다. 쿠바에 돌아온 피델은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분석했다. 조직과 지도자와 지도력이 없이는 민중들의 목숨을 바치고도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그는 깊게 되새김했다. 그때 피델은 21살이었다.   

보고타의 민중 항쟁을 직접 목격한 21세 피델은 조직과 지도자가 없는 행동으로는 사회를 개혁할 수 없음을 깨우쳤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보고타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세계 전복 기도 행위라고 비난했고, CIA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모스크바가 조종했다고 했다. 그러나 사건의 전개 과정을 되짚어 보면 모스크바가 개입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보고타 사태는 유력한 대선 후보를 암살한 일로 촉발되었다. 그리고 이에 항의하는 민중들에게 국가가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탄압을 가한 것이 폭력 사태의 원인이었다. 미국 정계가 이 사건을 계기로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은 앞으로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정권을 인정해 줄 것이라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군부가 CIA의 묵인 아래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기도를 막기 위해 나섰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미국이 군부정권을 인정해 줄 명분이 되었다. 미국이 이 결의안을 채택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잇달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베네수엘라를 시작으로 페루, 콜롬비아, 볼리비아, 아이티가 그랬고 쿠바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났다. 반공주의로 포장한 미국의 결의안 하나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가 겪게 될 비극을 불러내고 있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대통령. 그의 재임기간 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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