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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27 그란마

그란마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서는 무기를 들고 쿠바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카스트로는 미국과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 이민자들에게 기금을 모았다. 기금을 받기 위해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인 리오그란데 강을 수영해 넘어 모텔에서 만난 남자에게 5만 달러의 기금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 남자는 지독한 부패로 국민의 원성을 샀고, 바티스타에게 축출당한 프리오 전 대통령이었다. 프리오는 피델이 혁명에 성공할 때까지 25만 달러나 되는 돈을 무장 자금으로 댔다. 카스트로는 쿠바에서 가장 영향력 강한 아바나대학의 학생운동 지도자를 멕시코에서 만났고 서로 방법은 달라도 연대해 투쟁한다는 서약을 맺었다. 피델과 모반자들이 쿠바에 진입하는 날이 될 1956년 11월 30일에 산티아고에서 동시에 테러와 군사 작전으로 내응해 줄 세력도 확보했다. 그는 산티아고에서 노조 지도자들과 만나 총파업을 계획했고, 피델 일행이 상륙했을 때 합류할 대원도 모집했다. 쿠바공화국을 수호하는 자비의 성녀 카리다드가 쿠바 민중 신앙의 중심지인 엘 코브레의 해안에 도착할 피델 카스트로와 미래의 혁명 전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란마>호에서 내리는 혁명 대원들

  전날 카리브해에 폭풍주의보가 발령되었으므로 멕시코 정부는 어떤 배도 출항하지 못하게 했다. 그날 새벽 유카탄반도의 바닷가에 작은 흰색 요트 한 대는 집채만 한 풍랑과 비바람에 찢길 듯 위태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란마라는 이름이 페인트칠된 이 작은 요트는 최대 승선 인원이 20명인 작은 배였지만 피델을 비롯해 83명이나 되는 혁명 전사가 타고 있었다. 혁명의 긴 역사를 태운 그란마 호가 11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출항했다. 피델 일행은 폭풍으로 출항 금지 명령이 내려진 지조차도 사전에 알지도 못했다. 설사 미리 알았더라도 그들은 출항했을 것이다. 항구에 남아있다가 그들을 쫓는 바티스타 요원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원보다 4배나 많은 인원이 배에 탔고 무기, 식수, 비상 연료 같은 것들까지 실린 이 작고 무거운 배가 거친 풍랑까지 만났으니, 그란마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물이 차기 시작했다. 배를 버리고 헤엄쳐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원도 있었다. 혁명의 운명을 태운 그란마는 지금 풍랑의 바다를 떠돌고 있었다. 그란마가 그런 처지였을 때 산티아고의 7.26 운동본부에는 “주문하신 책이 다 떨어졌습니다. 윤전기를 돌리세요”라는 전보가 들어왔다. 멕시코의 7.26 운동본부가 보낸 이 전보는 대원들을 태운 그란마가 출발했으니 48시간 안에 약속된 해안 장소에 배가 도착한다는 뜻의 암호다. 그러니 사전에 계획한 일정대로 산티아고에서 총파업을 일으켜 정부군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그란마 대원들과 동시에 반란 행동에 돌입하라는 지시였다. 전보를 받은 동조자들이 행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작전은 어긋나고 있었다. 경찰에 발각된 박격포 사수의 주머니에서 ‘작전 지점’이라고 적힌 지도가 나왔다. 흰색 셔츠에 붉은색과 검정 바탕에 ‘26’이라는 숫자가 적힌 완장을 찬 반란군과 경찰이 교전을 벌였고 반란군이 패배했다. 경찰은 전국에 비상령을 발령했다. 산티아고의 반란군들은 완장을 버리고 군중 속으로 섞여 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3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반란은 시작하자마자 붕괴했다. 아바나에서는 반란을 시작도 하지 못했다. 전보가 날아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시작했어도 곧바로 진압되었을 것이다. 내응 하기로 한 아바나대학 학생운동 지도부가 무기를 30여 정밖에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 무장으로 아바나를 접수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그 총으로 바티스타를 저격하려고 계획했다. 가능성으로 보면 피델이 그란마를 타고 쿠바에 들어가 모반을 일으켜 혁명한다는 계획보다는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 더 커 보였다. 카리브의 거친 폭풍과 격랑은 혁명의 불안한 앞날을 예고했다. 그란마는 약속한 날보다 이틀 뒤에야 뭍에 닿았다. 그것도 애초에 예정했던 지점이 아닌 엉뚱한 곳에 도착했다. 해안선 100m 바깥에 내린 구명보트에 너무 많은 인원이 탄 까닭이었다. 발이 쑥쑥 빠지는 뻘밭 바닷길은 너무 멀었다. 겨우 뭍에 오르긴 했어도 대부분의 보급품은 카리브의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물집 잡힌 발은 터졌고, 허기지고 목마르고 무기도 없는 혁명 요원들의 사기는 멀미에 녹아내렸다. 이들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호응하기로 한 7.26 운동본부의 농민군은 이미 철수했으니, 뭍에서 엄호해 주는 지원도 없었다. 작전 지도를 입수한 바티스타의 군인들이 이 지역을 주시하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정부군의 전투기가 윙윙대고 날아다녔다. 발각되는 순간 하늘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을 것이었다. 그란마에서 내린 자들은 그저 그림자에 숨어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마침내 이들을 발견한 정부군 전투기가 기관총을 갈겨댔다. 3명이 즉사했고 살아남은 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피델 곁에는 2명의 대원과 총 2자루뿐이었다. 흩어진 라울 카스트로는 8명의 대원과 총 7정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을 의논하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바티스타가 미국 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부부 동반 카드 게임 동반자인 미국 대사에게 정부군이 피델의 요트를 바다에서 격침했고, 단 몇 명은 살아 뭍에 올랐지만 모두 체포했고, 피델도 사망했음을 확인했다는 소식을 직접 알려주었다. 대화는 다음 카드 게임 약속을 잡고 맺었다. 미국 신문들이 속보를 냈고 뉴욕 타임스는 이 토픽을 1면 머리기사로 뽑았다. “쿠바는 침략자들을 쓸어버렸다. 수괴 피델도 40명과 함께 죽었다.” 쿠바 정부군도 피델 카스트로는 사살당했고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피델은 죽지 않았다. 바다에서 산으로 옮아갔을 뿐이다. 그도 스페인의 가혹한 착취를 피해 들어간 다이노 씨마루아보들처럼 시에라 마에스트라산맥의 산마루로 들어가 자유를 찾아 굴종하지 않았던 마룬이 되었다. 산으로 간 피델의 전략도 바뀌었다. 게릴라. 다이노들이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항해 산마루에서 자신들을 지켜낸 오랜 전법을 피델이 이었다. 뉴욕 타임스가 죽었다고 오보한 피델과 라울 일행 15명은 다시 만났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다이노와 흑인들이 오랫동안 착취를 피해 숨어 살던 산마루에서 민중들과 함께 다시 혁명을 준비했다. 시가를 좋아한 천식 환자 체 게바라도 그곳에서 마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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