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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26 사회주의자

  그  무렵 바티스타를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은 피델이 아니라 아바나 대학의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시위만으로는 바티스타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학생들은 무장투쟁을 대비했고 경찰이 그들을 공격하면 학생들도 무장 반격했다. 학생들은 경찰을 먼저 자극해 공격을 유도하기도 하면서 무장투쟁 수위를 끌어올렸고 양상은 점차 폭력적으로 과격해졌다. 아바나 대학 캠퍼스는 늘 화염병과 쇠 파이프를 든 학생들과 경찰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간호학과 학생들은 알코올로 화염병을 제조했고, 의대생들은 산을 담아 경찰에 던졌다. 프로야구 경기장에서는 학생들이 경기장으로 뛰어 내려와 “바티스타 타도”, “군부독재 종식하자”라 쓰인 플래카드를 펼쳤다. 그러면 경찰들이 쏟아져 들어와 학생들을 곤봉으로 두들겼고 시민들은 경찰들을 야유하면서 “군부독재 타도하자”, “경찰들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함께 외쳤다.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는 “학생들은 방어할 수가 없지요. 아무 무장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학생들은 그저 경기장에 앉아 있기만 할 뿐입니다. 학생들의 무릎을 꿇리는군요.. 아! 지금 경찰들이 학생들을 두들겨 패고 있습니다. 군홧발로 짓이기네요. 참으로 부끄러운 장면입니다. 이것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라고 실황을 중계했다. 다음날 신문은 정부의 이런 행동을 비난했다. 1955년에 시위는 더 격화되고 있었다. 안토니오 마세오 장군 사망 59주년 기념일에 수백 명의 학생과 노동자가 아바나 공원에서 마세오 장군의 이름을 외치며 아바나 대학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경찰은 행진을 막으려 했고, 여의찮아지자 발포했다. 20여 명의 학생들이 총기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도 총에 맞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은 발코니에서 꽃병이나 프라이팬, 망치 같은 것을 경찰들을 향해 집어던지며 야유했다. 학생들은 바티스타 군부가 강경하게 대응할수록 국민은 바티스타에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학생들은 바티스타 정권의 잔인성을 고발하며 노동자들의 파업을 끌어냈다. 버스 기사들은 버스를 세웠고, 식당 종업원들도 서빙을 중단했다. 라디오 방송 운영자들도 방송을 중단했다. 모든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왔다. 심지어 세계적으로 음란한 쇼를 하기로 이름난 트로피카나 나이트클럽의 쇼걸들마저도 쇼를 거부하고 파업에 참여했다. 동조 파업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바티스타의 쿠데타 이후 처음 있는 전국적인 행동이었다. 20여 개의 도시가 죽은 도시가 되었고 쿠바는 신음하고 있었다. 폭력과 폭력이 맞부딪히는 강도가 강해질수록 쿠바 국민은 이제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변화를 이룰 수 없다고 확신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지녔던 시민단체에 시민들은 야유했다. 마침내 1956년 2월 아바나대학 학생운동 지도부는 바티스타 정권에 무장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쿠바 국민은 주권으로 결연하게 투쟁하고 희생할 것을 천명한다”라면서 “쿠바 혁명을 위하여”라는 선언문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바티스타 정권의 수뇌부들을 저격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놀랍게도 저격 대상에는 바티스타도 빠지지 않았다. 실제로 핵심 내각 장관을 나이트클럽에서 총격전으로 쏴 죽였고, 또 경찰 총수도 사살했다. 경찰은 혁명 세력에 가담한 10명을 보복 처형했다. 학생운동 지도부는 ‘친절한 대응’을 약속했고 같은 수의 경찰을 사살했다. 신문은 ‘학생들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밤이 되면 학생들이 폭탄을 터트렸다’라고 보도했다. 이런 기사는 매일 반복해 실렸다.

혼란스러운 아바나
미국인들에게 아바나는 여전히 홀리데이 천국이었다.

  피델이 잊힌 존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아직 이런 활동을 주도하는 거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때 쿠바에 피델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운동가는 많았다. 출소한 지 한 달째 되었을 때 피델과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몬카다 병영 습격 대원들과 함께 멕시코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때 피델과 의과대학을 졸업해 알레르기 전문의가 된 체 게바라가 처음 만나 혁명을 의논했다. 억압받는 모든 인간의 해방을 위해 혁명에 투신하려고 마음먹은 체는 착취당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면 라틴아메리카든 아프리카든 가겠다고 했다. 세계가 체 게바라라는 젊은 혁명가의 전장이었고 미국 제국주의가 비호하는 군부독재에 가장 첨예하게 대결하고 있는 쿠바는 그가 선택한 첫 번째 전장이었다. 피델은 ‘아메리카의 병사’가 되기로 한 체 게바라에게 혁명에 가담할 것을 제안했고, 다른 나라의 혁명을 위해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해 준다는 피델의 약속과 함께 체 게바라는 혁명에 가담했다. 피델은 멕시코에서 15가지 혁명 공약을 공개했다. 이번에도 대규모 토지 소유를 금지하고 초과한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배분하는 토지 개혁이 첫 번째였다. 정부 관료들이 횡령한 재산을 몰수하고 전기나 철도, 전화 같은 공공서비스를 국유화하고 무상교육을 확대하며 바티스타가 중단한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다시 회복한다고도 했다. 혁명 공약의 주체로 피델은 ’7.26 혁명 운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 단체의 리더는 피델 카스트로였다.     

1956년 멕시코에 있던 체 게바라

  체 게바라는 피델을 만나기 전 이모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을 인디오와 ‘우리의 위대한 아메리카’를 위해 싸울 태세가 되어 있는 ‘미래의 사회주의자’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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