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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25 행동

몬카다

  1953년 7월. 쿠데타가 일어난 지 16개월 지났다. 쿠바는 독립지도자 호세 마르티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있었다. 군중들은 매일 같이 호세 마르티 동상 아래서 ‘쿠바 리브레’를 외쳤다. 피델은 이제는 군부독재 타도 투쟁을 새로운 방법으로 전환해야 할 시기임을 확신했다. 그는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을 무장 공격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몬카다 병영은 쿠바에서 두 번째로 많은 무기를 보관하고 있는 군부대였다. 몬카다 병영을 장악하면 3,000정의 무기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와 함께 무기와 자동차를 살 자금을 모집했고 젊은 대원들을 모집했다. 대원들 다수는 피델이 속한 치바스의 정통당원들이었다. 그해 7월 25일, 135명의 모반자가 행동을 시작했다. 산티아고는 쿠바섬에서 활기차기로 유명한 축제를 즐기는 도시였고 이날은 산티아고에서 가장 큰 콤파르사 축제가 있었다. 이 소란스러운 축제 날에는 부대 안의 군인들도, 시내의 경찰들도 대개는 술에 취해있기 마련이었다. 요란한 음악과 춤으로 뒤덮인 길은 모반자들이 군중 속에 섞여 위장하기에 좋았다. 그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라울 카스트로는 대원들을 이끌고 법원 청사와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려고 했고 또 한 부류는 군 통신체계를 장악할 것이었다. 피델은 95명의 대원과 함께 병영을 장악해 대량의 무기를 확보한 즉시 라디오를 통해 독립의 아버지인 호세 마르티 100주년을 기념하는 성스러운 권리로 국가를 위해 혁명을 시작한다는 성명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큰 병영이므로 그곳에는 군인들도 많았다. 피델은 병영을 장악하고 나서 군인들을 설득하면 그들을 반바티스타 투쟁에 동참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피델은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대원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여러분, 이 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 행동은 뒷날 쿠바 민중들이 이루어 낼 혁명을 일깨울 발화점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있는 영원한 동지 호세 마르티가 이루지 못한 열망을 이룰 수 있는 첫 번째 시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면 우리 쿠바 인민들이 강대국 미국의 억압과 착취에 희생당하는 삶을 더는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쿠바 민중들을 위해 희생하고 또 혁명의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강대국 제국주의의 억압을 이겨내고 우리 쿠바가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가 죽음으로써 첫 번째 행동을 시작합시다!”  

   

몬카다병영 습격 당시 상황/텔레그라프

  7월 26일. 모반자들은 작전 개시 시각에 제때 맞춰 도착하지도 못했다. 이동할 차를 도난당하기도 했고, 또 일부는 축제 행렬에 가로막혀 있었다. 피델의 대원 95명 가운데 현장에 도착한 대원은 44명. 모반자들은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4명의 선봉 저격수가 출입문에 접근해 초병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찰 없이 정문을 통과하는가 싶었으나 이들이 외부인인 것을 알아챈 초병이 소리를 질렀고 동시에 군인들이 모반자들에게 총을 퍼붓기 시작했다. 라울 쪽 대원도 5명이 죽었고 여럿이 체포되었다. 피델은 자동차에 불이 붙어 병영 안에 진입하지도 못했다. 피델은 무장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가까운 씨보네 마을 산으로 도피했지만, 며칠 만에 도피 중에 움막에서 잠을 자다 ‘너무나 슬플 정도로 불명예스럽게 경찰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젊은 피델이 보기에는 철수나 후퇴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을 만큼 '완벽한 작전‘이었지만 실제는 오합지졸들의 공격이었다. 계획은 영화 같았지만, 결과는 무참한 실패였다.     

몬카다병영 습격 사건 관련 보도 기사

  이 습격으로 33명의 병사를 잃은 바티스타 군은 학생들에게 잔인하게 보복했다. 체포되어 수감된 대원 56명이 총살당했다. 사체들이 길가에 내버려졌고 대다수는 치아도, 눈도 모두 뽑힌 채였다. 온몸이 담뱃불로 지져진 채 죽은 두 여학생의 시체도 있었다. 한 여학생은 친오빠의 눈알과 애인의 잘린 성기가 담긴 접시를 들고 사진을 찍어야 했다. 바티스타 군부의 잔인한 대응은 민심을 젊은 반란자들을 동정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했다. 늘 지배자의 편이었던 가톨릭 주교들마저도 이번에는 군부의 지나치게 가혹한 대응을 비난하고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정지한 헌정을 다시 회복하고 헌법에 따라 기소된 학생들을 공정하게 재판하라고 요구했을 정도였다. 온 섬에서 바티스타를 비난했다. 바티스타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어설프기만 했던 폭력투쟁이 피델의 정치적 자산으로 바뀌고 있었다.

      

수사받고 있는 피델 카스트로

  피고인 피델. 그러나 재판은 오히려 피델이 바티스타 군부와 국가의 범죄를 재판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피델은 변호사인 자신이 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있음을 재판장에게 요구했고 이에 수긍한 재판장이 피델의 수갑을 풀게 했고, 피델은 피고인일 때는 죄수복을 입었다가도 피고인인 자신과 대원들을 변호할 때는 죄수복 대신 변호사 법복으로 번갈아 입었다. 판사가 피델에 ‘피고는 군부대 습격 사건에 가담했는가’하고 물었을 때는 피고인 피델은 ‘그렇다’라고 짧게 한 마디로 대답했으나, 판사가 ‘다른 피고인들도 그 사건에 가담했는가’하고 물었을 때 변호인 피델의 대답은 길었다. ‘나처럼 저 젊은이들은 조국의 자유를 사랑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면 저들은 죄가 있다 할 수 없습니다. 국민은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학교가 우리 국민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는 호세 마르티와 세스페데스, 안토니오 마세오 장군 같은 모든 국민이 존경하는 쿠바 독립 영웅들의 철학과 저항과 투쟁을 인용하며 피고들을 변론했다. 판사가 몬카다 캠프를 습격하겠다는 생각은 누구의 생각이었느냐고 묻자 피델은 쿠바 독립 투쟁에 순교하신 호세 마르티의 생각이었다고 대답했다. 재판정 방청석의 시민들은 박수로 호응했고, 재판장은 조용히 할 것을 명해야 했다. 피델은 헌법이 정한 국가 기구인 군대를 공격한 혐의로 기소된 자신에 대한 최후 변론에서 “헌법은 국민을 탄압하는 독재 정권에게 어떤 권한도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그것은 위헌적이며 헌법에 반하는 기구일 뿐이며 쿠바공화국의 헌법을 파괴한 데 사용된 도구일 뿐입니다”라며 그는 마르티, 마세오, 고메즈, 세스페데스 같은 쿠바 역사의 영웅들의 독립사상과 투쟁에 관한 생각과 영국의 명예혁명과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혁명을 예로 들고 루소 같은 사상가들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이렇게 최후의 변론을 마쳤다.

  “우리는 지금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는 60만 쿠바 국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아침에 먹을 빵을 살 수 있을 만큼이라도 돈을 벌어야 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조국을 떠나지 않고 정직하게 일해 빵을 살 돈을 벌고자 합니다. 50여만 명의 빈곤한 농민들은 열악한 움막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 년 중 네 달만 일할 수 있습니다. 남은 8개월은 일도 없고 빵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40여 만 명의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연금은 횡령으로  텅 비었고, 땅 한 뙈기 없는 10만여 소작농들은 남의 땅에서 죽도록 일해봐야 살아갈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교사, 소상인, 젊은 예술가들의 어려운 형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피델은 그가 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뒤 곧바로 라디오 방송에서 밝히려 했던 다섯 가지 혁명 정책을 언급했다. 가장 먼저 바티스타가 헌정을 중단시킨 1940년 헌법을 존중하고 헌법에 입각한 정치를 복원할 것 그리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제공하며 부당하게 취득한 토지는 국가가 몰수할 것 등 1933년의 헌법에도, 1940년의 헌법에도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피델은 다시 확인했다. 어설펐던 몬카다 병영 무장 습격 작전과 달리 법정에서 피델의 생각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피델은 쿠바 국민이 잘 알고 있고 또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고 널리 공감하고 있는 사회 정의와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정책들을 온전하게 추구하고 있었다. 그가 바티스타를 기소한 재판에서 그의 최후 변론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다. 내가 체포된 것은 시작일 뿐이다. 당신들이 내 심장에 총구멍을 내더라도 조국, 정의, 인간에 대한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잘 들으라. 당신들은 진실을 가리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단을 쓰겠지만, 나는 기필코 당신들의 더러운 역사를 낱낱이 세상에 고할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막고 이 비좁은 공간에 가둘수록 내 혁명을 향한 나의 의지는 더 솟구칠 것이며, 당신들이 내 몸을 결박할수록 우리 쿠바 민중들은 혁명 의식을 자극받을 것이다. 또한 당신들이 수작질해 나와 대원들의 숭고한 정신을 왜곡하여 재판장이 내게 유죄를 선고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역사는 반드시 내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판사는 피델에 15년형을 선고했다.      

  피델은 독방에서 칼 마르크스의 혁명 사상에 대해 고민하고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을 탐독하며 인간 본성과 현대 정치에 대해 사유했다.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의 전기를 즐겨 읽으며 성장했던 그는 프랑스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책을 읽으며 혁명을 구상했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1917)을 6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읽었고, 칼 마르크스의 <프랑스 계급투쟁>, <자본론> 같은 저작물들을 완벽하게 학습했다고 회고했다.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사회 환경과 계기는 어떤 것들인가. 무엇이 혁명을 발화하는가. 그리고 혁명을 성공으로 또는 실패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혁명을 이끄는 자는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모든 성공한 혁명은 절정의 순간에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자들이 깃발을 이끌고 나갔다는 것도 역사를 통해 보았다. 그는 감옥에서 “쿠바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모든 것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싶다”라고 결심했다. 15년형을 마치고 다시 민중에게 돌아가는 날에 어떻게 다시 시작할지 혁명을 이미지로 훈련했다. 그는 감옥에서 민중들에게는 단 하나의 프로파간다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혁명이 추구하는 가치를 단순하며 명쾌하게 끝없이 반복하는 것. 선전에서는 그것이 중요했다. 감옥에서 동지들에게도 모든 투쟁의 정수이자 영혼이 될 프로파간다를 뽑아내고 실천하는 것이 혁명 사업의 첫 번째 과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델은 죽기 전에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을 때 이미 “사회주의는 우리의 사상이었다”라고 했다. 그는 감옥에서 혁명을 간접경험으로 익혔다. 그에게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험은 율리시스에게 사이렌의 노랫소리였고 대서양을 건너는 침략자들의 나침반이었고, 아메리카로 향하는 길을 나선 동북아시아 초원 여행자들의 북두칠성 같은 것이었다.      

산티아고 데 쿠바의 몬카다 병영 박물관. 몬카다 습격 사건의 영웅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쿠바 역사는 이 사건을 쿠바 혁명의 시작점으로 본다.

  실패란 포기 하면 그대로 패배로 끝나지만 다시 도전하면 그것은 새로운 전진의 에너지로 바뀐다. 마르티 정신을 따르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군부독재에 항거해 목숨을 던진 몬카다 습격 이야기에는 큰 울림이 있었다. 마차도 정권 때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트리오 마타모로스 밴드가 부른 노래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피델이 1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는 동안 쿠바 민중들 사이에서 다시 유행했다. 큰길에서는 매일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했고, 건물 옥상에서 뿌려진 유인물은 햇빛에 반사해 반짝이며 아스팔트에 내려앉았다. 시민들은 쿠바 국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집회에 참여했다. 바티스타의 두 번째 쿠데타 뒤로 모든 쿠바 국민은 어떤 방식으로든 위헌적 정권을 종식하려는 시위에 가담하고 독재에 항거하고 있었다. 분노한 민중들이 관공서, 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대규모 파업과 학생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피델의 방식에 국민 여론이 호응했고 7.26 몬카다 병영 습격을 계기로 바티스타 독재 권력과 싸우는 국민의 투쟁은 무장 폭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몬카다 작전은 실패했지만 피델의 혁명은 승리하고 있었다. 피델은 그의 혁명 거사를 ‘7월 26일 운동’이라 명명했다.      

쿠바 혁명 정신을 상징하는 <7.26>

   한국전쟁이 끝나고 설탕 달러 호황도 꺼지자, 쿠바에 다시 경제난이 닥쳤다. 국민의 저항을 이기지 못한 바티스타가 정치범들을 사면했다. 해외로 망명한 인사도,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쫓겨난 프리오 전 대통령도 사면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그 대원들만은 사면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시민사회가 바티스타에게 경고했고, 경고를 받아들인 바티스타가 피델도 2년 만에 사면했다. 궁지에 몰리고 있는 바티스타는 미국의 반공주의에 코드를 맞추기 위해, 즉 미국에 정권 보호를 요구하기 위해 피델을 공산주의로 몰았다. 그러나 피델은 갇히기 전에도, 풀려 난 뒤에도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하지는 않았다. 또 오랜 시간 동안 공산주의자라는 평가를 스스로 거부했다. 그는 혁명에 성공한 뒤인 1959년에 뉴욕을 방문했을 때 자신을 “민주주의자이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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