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산티아고

2. 산티아고

#031 로망

by 조이진

트로바도르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렸다. 기독교 세계는 100년 단위로 종말론이라는 페스트에 시달려왔는데 하물며 예수 사후 첫 번째 밀레니엄일 때는 오죽했을까? 다행히 그때도 신은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았다. 두려움이라는 페스트도 가셨다. 이제 사람들은 깨달았고, 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라는 생각이 발견되었다.


이베리아에서 분 자유의 바람은 북문인 피레네산맥을 열고 옥시타니아로 불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대신 오히려 인간을 구속하고 겁박한 신을 대신해서 노래가 인간에게 자유를 깨우쳤다. 자유라는 밝고 활달한 생기를 품은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와 시가 신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장막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트로바도르Trovador, 방랑하는 음유시인이다. 왕과 궁정 귀족들은 바람 난 연애 이야기나 귀족 부인을 사랑해 목숨을 바친 순정 멜로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궁에 갇혀 사는 귀부인들에게는 트로바도르가 들려주는 달콤한 러브스토리는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부인들의 그런 욕구를 알아챈 트로바도르들은 아름다운 귀족 유부녀에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용감한 기사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백마 탄 기사가 성에 갇힌 귀부인을 구하기 위해, 또는 귀부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결투했다는 기사 문학이 트로바도르의 작품 스타일이었다. 또 ‘창문을 열어다오, 내 사랑하는 마리아~’ 하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아름다운 구애 이야기도 트로바도르의 노래 스타일이었다.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유부녀를 구한 기사들의 결말은 대개 기사의 아름다운 죽음으로 끝났다. 늙은 기사 돈키호테의 ‘사랑스러운 귀부인’ 둘시네아는 당시 트로바도르 기사문학의 전형적인 캐릭터였다.


트로바도르가 나타나기 전까지 중세 유럽에서 여성들은 요부, 마귀의 도구, 필요악 같은 대상이었다. 이브 때문이었다. 마귀인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과 억압은 정당한 것이었고, 여성은 남성의 예속물이라는 생각은 중세 유럽에서는 상식이었다. 그런 풍조를 새로 등장한 트로바도르가 바꿔주었다. 때로 후글라르처럼 관객을 웃겼고, 바람둥이 남자 귀족을 노골적으로 풍자하고 조롱해 여인들의 마음을 사기도 했지만, 트로바도르는 후글라르보다는 더 문학적인 형식을 갖추었고, 표현은 지적이고 아름다웠다. 죽고 죽이는 일에 정신이 팔린 남자들이 십자군 전쟁터로 떠나 있는 동안 궁 안에서 무료한 귀부인들은 트로바도르를 초대해서 백마 탄 기사 이야기를 들었고, 트로바도르는 관객인 여성이 좋아할 스토리를 개발해 냈고, 그것이 궁정문학이라는 장르가 되었다. 류트를 연주하며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달콤한 가락에 실어 읊었다. 트로바도르 문학과 음악이 신을 대신해 여성의 존엄함을 노래하고 여성의 인격성을 처음으로 존중했다.오히려 여성이 고상하고 고귀한 존재, 존경과 명예의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트로바도르가 만들어낸 변화였다. 사랑하는 귀부인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 남성들은 겸손과 자제, 인내, 충성심과 교양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트로바도르는 기사들의 매너와 예의에 기반을 둔 사랑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트로바도르가 새롭게 발견한 생각은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등 유럽에서 여자도 군주가 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4세기의 노래하는 트로바도르와 연주자들

옥시타니아의 트로바도르들이 로망스어를 발전시켰다. 트로바도르들이 말하는 달콤한 언어를 로망스어라 했고, 그들의 유부녀를 향한 순수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스타일의 문학을 로망romance이라 했다. 그래서 로망은 아름다운 사랑의 꿈을 노래하는 연애 문학이다. 로망 문학을 개척한 최초의 트로바도르는 프랑스의 기욤 9세 공작이다. 그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는 척하고 군사를 일으키고는 이교도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먼저 출전하여 군사적으로 공백이 된 옆 나라를 공격했다. 화가 난 교황이 이를 문제 삼아 기욤 9세를 파면하려고 하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마음에 없던 참전을 했다가 별 성과를 얻지 못했고 겨우 목숨만 떨어지지 않은 채로 쫓겨 나왔다. 그래서 역사는 그를 기사로 기억하지 않고 새로운 서정 문학 장르를 개척한 옥시탄의 로망 시인으로 기억한다. 그의 작품은 시적 형식이나 시어의 운율, 서정적인 주제 등에서 이전의 시와 노래와 확실히 달랐다. 사랑과 연애, 여성은 물론이요. 섹스 같은 성적인 내용도 다루었다. 그의 문학은 이전의 문학과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그는 춤을 추며 부르기에 좋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의 음악이 나오기 전까지는 음악은 부르기 위해서 노래하는 음악이었지 춤을 추기 위해 부르는 음악이 아니었다. 춤은 노래에 곁들인 작은 장식이었는데, 이제 발상이 바뀌었다. 피레네 바스크 지역에서 음악의 역사를 또 한번 혁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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