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기사단
아리스토텔레스
엔히크의 배가 항행할 때 두 개의 깃발이 휘날렸다. 하나는 포르투갈 왕실 깃발, 다른 하나는 정사각형의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전쟁 때 들었던 그 깃발이었다. 포르투갈에게 항해는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었다. 먼저 엔히크의 항해는 십자군 성전이었다. 불신자들과 이슬람 이단자들의 땅을 정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영토를 넓히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하는 바다의 성당기사단이었다. 십자군 기사단의 다른 얼굴은 상인길드의 얼굴이었다. 이 성전을 치르는 바다의 성당기사단이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남하한 것은 노예라는 상품 때문이었다.
포르투갈 성당기사단은 아프리카인 노예를 잡아다 팔았다. 판매 시장은 물론 유럽 기독교 세계였다. 기독교도의 지극한 사명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불신자들인 검은 황금들을 기독교 세계에 데려다 놓고 백인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은 기독교를 접하게 해주는 은혜롭고 복된 일이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은 검은 황금들은 백인의 노예로 살아야 천국에 갈 기회를 얻는 일이라고 여겼다. 기독교도의 노예가 되는 것은 피부 검은 이들에게는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았다. 위대한 서양철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인과 노예는 본디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른 천성을 가지고 타고난다고 설파했다.
그의 생각은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큰 가르침으로 스며있었다. 예수도 거룩한 말씀 중에 주인과 노예의 비유를 자주 했다. 그리스도도 주인과 노예가 따로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아우구스틴이라는 교부신학자가 원죄론을 개발했다. 노예는 신의 징벌을 받아 그런 운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라 가르쳤다. 불신의 땅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천벌이니까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신부가 또 지고지순한 이론을 개발해 냈다. 자연은 본디 계급사회고, 인간은 천국에서마저도 불평등했다. 그러므로 나무를 베는 노동자부터 제후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다른 일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합법적이라고 했다. 계급은 본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노예를 억압하고 부리는 일은 자연의 법칙이라 했다. 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여 먹여 살려주는 것은 자비로운 일이니, 기독교도가 검은 사람들을 잡아 데려와 기독교도에게 봉사하게 하여 먹여주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요 참으로 복된 일이라 했다. 가톨릭 사제들이 식민주의를 그리스도의 뜻과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식민제국주의와 기독교는 그때 이미 한 짝이 되었다. 서로 의지하고 지탱했다. 마침내 1452년 교황은 포르투갈 십자군 전사들에게 “가서 불신자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 사는 자들을 노예 삼아라.”라는 영을 내렸다.
창세기. 피부 검은 자들은 함의 자손들이다. 함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아버지 노아의 나체를 보았다. 그 이유로 함은 저주를 받아 종이 되었고, 함의 자손들이 가나안과 아프리카인의 원조라는 것이다. 세 아들 중 야벳이 노아의 수치를 가려주었다. 야벳이 백인들의 조상이다. 이런 이유로 함의 자손들은 야벳 자손들의 노예로 살도록 정해졌다는 것이다. 이 신은 한번 저주를 내리면 풀어주는 법이 없었다. 창세기 때 시작한 이 저주를 지금까지도 풀어주지 않았다. 그 신은 관용이 없다. 그리고 피부색을 기준으로 차별한다. 그 신을 믿는 이들은 신의 생각에 충실했다. 쿠바에서도 노아의 원죄는 쓰임새가 좋았다. 아프리카인은 사탕수수밭의 고통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며, 그것은 오히려 흑인들에게 은혜로운 일이라 했다. 피부색으로 나락과 피를 골라내는 신은 노예 부린 자들을 또한 흡족히 여겨 징벌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자들은 사나운 채찍질이 끝없이 살을 찢었다. 살아있었지만 이미 지옥살이였다. 그리스도는 백인들에게는 사랑으로 왔다. 그러나 아프리카인과 억압받은 자들에게는 저주로 왔다.
배는 한 번에 많은 노예를 실을 수 있었다. 모슬렘 노예 상인들은 낙타에 매달아 사막을 건너 몇십 명을 데려왔다. 배를 탄 포르투갈의 기독교 성당기사단들은 한 번에 몇백 명씩을 데려왔다. 노예무역에 규모가 달라졌다. 모슬렘은 상인 단위로 거래했지만, 기독교도들은 국가 차원에서 노예를 사업화했다. 모슬렘이 노예거래를 주도했을 때 노예거래 시장은 대개 지중해 주변에 있었다. 기독교도가 노예거래를 장악하자 물류 혁신이 일어났다. 아예 현지 항구에서 대량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엔히크가 혁신을 주도했다. 그가 처음으로 항해 학교를 만들었다. 학교는 바다에 관한 지식을 진보시켰다. 노예선은 그의 대표적인 혁신 사례다. 처음에는 향신료를 실어 나르는 배로 노예를 실어 날랐다. 노예 거래량이 많아지자 노예 전용선을 개발했다. 화물인 노예를 최대로 더 많이 적재할 수 있도록 공간을 설계했다. 쇠사슬에 묶은 채 빼곡하게 눕히고 차곡차곡 몇 개 층으로 쌓았다. 말 한 마리를 싣고 가서 노예 일곱과 맞바꾸어 실어 왔다. 아프리카인 일곱 명이 말 한 마리 값이었다. 노아의 저주는 정말로 두려운 것이다. 항해 학교가 연구를 거듭해 노예 전용선은 갈수록 대형화되었다. 노예를 선적하는 항구도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넓혀갔다. 옮겨가면서 거래량이 늘었다. 피부 하얀 자들이 아프리카의 마을에 들어가서 피부 검은 자들을 잡아 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마을을 덮쳐서 그물을 던져서 묶어 끌고 오는 일은 그 지역의 족장들이 했다. 족장들이 1차 생산자인 셈이다. 부족 간에 싸움을 벌여 적을 잡아다 백인들에게 팔아 돈을 만들었다. 포르투갈에 끌려온 이들 중에는 신분이 꽤 높은 무어인도 섞여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 왕에게 10명을 잡아 보낼 테니 자신을 풀어달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노예무역에 집중한 이베리아의 십자군 전쟁. 기독교 세계는 도덕적으로는 파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