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엘 미나
엘 미나
1482년, 콜럼버스가 카리브에 도착하기 10년 전이다. 포르투갈은 가나 앞바다에 엘 미나El mina라는 성을 건축했다. 아프리카인들의 피부색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흰 회벽을 칠한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까지 아프리카에 흰색을 칠한 건물은 없었다. 엘 미나는 금광이 가까이 있어 금을 실어내기에 좋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교부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받는 유럽인들에게는 땅에서 캐는 노란 황금뿐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검은색 피부의 두발 달린 황금도 있었다. 훗날 영국이 이곳을 차지하고 식민지로 착취하면서 황금 해안Gold coast이라 부른 것도 그런 이유였다. '금광'이라는 이름의 성을 지은 포르투갈은 솔직해졌다. 노예제도가 이교도와 야만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전도 사업의 성격을 갖는다는 따위의 싱겁고 거추장스러운 허울도 벗어던졌다. 이문을 중시한 어비스 가문답게 이것은 비즈니스일 뿐이었고 국가적 전략 사업이었다. 엔히크는 노예선마다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가 들어간 깃발을 만들어 걸게 했다. 포르투갈의 국왕과 그들의 하느님은 기꺼이 인신매매범과 한패가 되었다. 노다지를 캐는 성 엘미나가 세워지고 나서 인류 역사는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 노예 사업은 배를 타고 와서 노예를 태워 떠났는데 이제는 노예 상인들이 엘 미나에 거주하고 정착하면서 노예 사업을 추진했다. 본국에서 사람을 이주 정착시켜 영구 지배하는 '식민'이 본격화되었다. 식민이라는 개념과 제도는 이제는 멀리 떨어진 곳도 원격 지배할 수 있다는 새로운 생각을 열어주었다. 엘 미나에서 식민 지배라는 침략 수탈 모델이 만들어졌다. 엘 미나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식민지는 금과 노예를 캐는 노다지 광산이라는 의미였다. 수탈과 착취가 식민지의 근본 개념이다.
리스본에는 노예의 집Casa dos Escravos de Lisboa이 있었다. 노예를 사고파는 모든 일을 관장하는 기관이자 공간이었다. 포르투갈 노예선이 대형화되자 검은 황금들이 대거 노예의 '집'에 들어왔다. 이 시절 리스본 인구 백 명 중 열 명이 아프리카인들이었다. 강이고 바다고 어디서나 검은 노예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유한 집은 소나 개처럼 ‘새끼’를 낳는 일만 하는 여자 노예가 따로 있었다. 여자 노예들은 남자 노예들의 성욕을 풀어주는 일과 ‘새끼’를 증식하는 일을 위해 사왔다. 기독교인 주인은 그렇게 태어난 ‘새끼’를 바구니에 담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장터에 진열된 바구니에 담긴 강아지였다. 그들은 돈이 된다면 그렇게 했다.
인디아
항해왕이라고 불린 노예상인 엔히크가 죽었다. 포르투갈의 항해왕은 인류에게 식민주의라는 수탈 모델을 남겼다. 그의 기도처럼 그는 복되고 거룩한 자가 되었을까? 요한계시록은 ‘짐승과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옆에서 보좌에 앉게 된다'라고 했으니 그도 그 보좌에 앉았을 것이다. 죽은 엔히크가 포르투갈의 항해 정신을 불태웠다. 남으로, 남으로 갔다. 누런 황금과 검은 황금을 위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최종 목표지는 인도의 항구 도시 고아Goa였다. 기독교인들은 전설의 왕 요한이 동방에 건설한 기독교 왕국이 고아에 있을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그 동방의 위치는 아프리카 북동쪽 어딘가라고 알려졌고 그곳을 인디아라고 불렀다. 북동쪽 아프리카라면 성경 <열왕기 상>에 기록된 솔로몬과 사랑에 빠진 여왕의 나라 사바Saba 왕국을 말한다. 사바 왕국은 에티오피아 인근 어딘가로 추정하고 있다. 통상과 외교를 위해 이스라엘에 간 사바 여왕이 첫눈에 솔로몬에게 반해 그와 연애해 아들을 낳았고, 유대인을 이끌고 자신의 나라 에티오피아로 돌아왔고, 아들이 장성해 유대인 세력을 중심으로 에티오피아에 강대한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는 전설이 유럽에 떠돌았다. 유럽 기독교도들이 생각하기로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고 생각했지만, 유대교 국가였을 것이다. 실제로 현대 에티오피아인들은 골격으로 볼 때 백인과 꽤 섞였고 기독교를 믿고 있다. 바로 이웃한 예멘인은 피부색이 꽤 어둡고, 흑인에 가까우며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솔로몬과 사랑을 나눈 아름다운 시바의 여왕이 있는 에티오피아. 기독교인들은 모슬렘이 가로막아서 에티오피아에 오갈 수가 없다고 여겼다. 이슬람 세력을 쳐부수려면 아프리카 동쪽에 있는 새로운 기독교 세력을 만나 양쪽에서 모슬렘을 포위 협공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을 포르투갈이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라센인들이 장악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지역의 향신료 루트를 포르투갈이 차지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처럼 전설도 늘 이중구조였다. 노예 왕 엔히크는 셋째 아들. 본국에서는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새로 차지하는 땅은 자신의 영토로 삼을 수 있었다. 요한이 지배한다는 이야기 속 동방 왕국은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또 엄청난 황금과 보석으로 뒤덮인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그곳이 인디아였다. 인도는 그에게 약속의 땅이었다. 인도를 빼앗고 중간의 모슬렘을 제압하여 향신료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비전이었다. 포르투갈 사람 바스쿠 다가마가 처음으로 인도에 도착했을 때 인도 사람들이 ‘당신들은 이곳에 왜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과 향신료를 찾아왔다’라고 답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인도 남부 첸나이는 인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대다수인 인도에서 뜻밖에도 기독교도가 상당한 곳이다. 이곳에서 기독교가 뿌리내린 것은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사도 도마Thomas가 이곳에 와서 포교했기 때문이다. 첸나이에 사도 도마의 무덤이 있다. 초기 기독교 시기부터 인도에 기독교가 상당히 퍼져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것을 엔히크 시대 포르투갈 사람들도 꽤 잘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를 믿는 기독교도들이 많은 첸나이 왕국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향신료 집산지 고아와 에티오피아를 향했다.
리스본과 엘 미나로 오가는 포르투갈 노예선. 한 젊은 남자가 서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페인어 El mina는 영어 'mine'과 같은 '금광'이라는 뜻이다. 아프리카에서 누런 황금도 검은 황금도 실어내는 유럽인들의 거점 도시 엘 미나는 대서양 바다를 장악하려는 유럽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