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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엘 미나

3. 엘 미나

#041. 마데이라

by 조이진

마데이라

마데이라제도는 지중해 입구에 있는 포르투갈령 섬으로 1419년 엔히크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발견할 때까지 이 섬은 아담과 이브나 살았을 것 같은 천연의 섬이었다. 이 섬이 포르투갈의 최초의 해외 영토였는데, 이때부터 유럽인들은 지중해 바깥의 새로운 땅을 '점령'한다는 말 대신 '탐험'이라는 말로 미화했다.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면 '탐험'은 '침공', '침략'이었다. 마데이라는 포르투갈어로 나무라는 말인데, 엔히크가 처음 이 섬에 왔을 때 온통 나무로 뒤덮인 섬이라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엔히크는 이 섬에 사람을 정주시키기 위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숲을 불태웠는데 7년 동안이나 타고 나서야 민둥 한 섬이 되었다. 마데이라는 유럽의 식민지 개발 정책의 첫 모델이 되었다. 엔히크는 불태운 섬 전역에 사탕수수를 심을 것을 명했다. 당시 지중해와 유럽은 상업이 발달했고, 부유층이 늘면서 설탕 수요도 크게 늘고 있었다. 안달루시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는 했지만, 그 생산량은 보잘것없었다. 1480년대 들어서면서 마데이라제도의 사탕수수 농업은 큰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설탕을 실어 나르는 포르투갈 배들이 대형화했다. 마데이라는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를 남하해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갈 때도, 대서양을 횡단해 브라질 식민지를 정복할 때 기착지로 사용된 포르투갈의 중요한 식민지였다. 이 섬에서 마지막으로 식량을 싣고 물을 채웠다. 그것보다는 이 섬이 유럽의 식민지 개발 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이 신대륙에서 시행하는 식민화 정책 수단 거의 모두가 이 섬에서 개발, 실험되고 검증되었다. 마데이라의 토양과 기후는 수익성 높은 작물인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했고,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에서 손쉽게 흑인 노동력을 확보했다. 1460년 무렵 마데이라에 처음으로 제당소가 설치된 뒤로 제당 기술을 발전시켜 1478년이면 마데이라 섬이 유럽 최대의 설탕 산지가 되었다. 설탕과 아프리카 노예 노동력의 결합. 그 새로운 생각의 발견자가 포르투갈의 엔히크였다.

포르투갈 식민지 마데이라제도. 적도 가까이에 스페인 식민지 카나리아 제도가 있다. 두 섬은 두 나라의 식민지 정복의 주요 거점이었다.


콜럼버스가 쿠바에 상륙하기 10여 년 전 일이다. 제노바 상인 콜럼버스는 장삿배를 타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를 거쳐 1478에는 마데이라에서 설탕을 구매해서 제노바로 가져가 팔았다. 콜럼버스가 마데이라 귀족의 딸과 혼인해서 한동안 이 섬에 머무르는 동안 콜럼버스는 설탕 맛을 보았고 설탕을 흑인 노예들의 피로 만든다는 것도 눈여겨보아 두었다. 그가 본 설탕은 흰 핏방울이었다. 포르투갈이 마데이라를 '탐험'하고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뒤로 마데이라의 사탕수수 농업이 카리브해와 브라질로 옮겨갔다.


+ 유럽인들은 쿠바를 비롯한 아메리카 전역에서 불을 질러 숲을 완전히 태웠다. 플랜테이션 농장을 짓기 위해서였다. 식민지는 인간도 자연생태도 파괴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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