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향신료
향신료
중세 유럽에서 향신료는 용도가 다양했다. 요리에도 많이 쓰였지만, 부자들은 식탁에서 음료에도 향신료를 양념으로 넣어 먹었다. 포도주에도 향신료를 넣었다. 고급 포도주로 인식되었다. 부유할수록 더 많은 향신료를 포도주에 넣었다. 향신료를 더 많이 넣은 포도주를 내놓을 때 손님을 더 융숭하게 대접한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식후 디저트에도 부자들은 향신료를 폭넓게 뿌렸다. 아이스크림 잔 주변에 계피를 발랐다. 향신료와 설탕을 듬뿍 들이부어 만든 빵과 디저트는 부요함과 신분을 상징했다. 설탕으로 범벅된 케이크와 빵은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의 식탁에는 설탕통, 후추통이 놓여있었다. 과시하고 싶을수록 아주 크게 만들어 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했다. 설탕통 후추통을 값비싼 은이나 크리스털로 만들었다. 은 식기를 손님에게 내밀며 마음껏 뿌려 먹으라고 권했다. 중세 중후반 아랍 상인들이 페르시아만과 홍해를 장악하고 인도 서쪽 해안에서 실어 오는 향신료 교역을 통제하고 독점했다. 향신료 무역 루트는 무척 길었다. 육두구는 인도네시아 동부 작은 섬에서 배로 말라카로 옮긴 다음 인도의 코친이나 고아까지 운송했다. 거기서 아랍 상인들이 페르시아만 호르무즈 섬이나 아덴만으로 실어 갔다. 이 지역은 오늘날도 해적이 잦기로 이름난 곳이다. 이 지역이 혼란하면 동양과 서양의 교역 사슬이 무너졌다. 이곳을 지나면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사막이나 홍해로 운송된다. 여기까지 무사히 지나면 마지막으로 낙타 등에 실려 사막을 건너 지중해 동부 해안 도시와 베네치아까지 운반되어 대장정이 끝난다. 통과하는 구간마다 왕이 있고 성주가 있어서 관세가 더해졌다. 부가가치는 계속 올라갔다. 향신료가 원산지에서 유럽 시장까지 오려면 10단계 이상의 유통 단계를 거쳐야 했다. 베네치아에서 후추 가격은 생산지 인도보다 30~40배가 되었다. 최종 소비지인 12세기 유럽의 왕실 주방에서는 육두구 1파운드가 양 세 마리 가격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양은 소보다 훨씬 비싼 최고급 고기였다. 정향과 육두구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쌌다. 그러므로 은으로는 살 수 없고 오직 금으로만 살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구해 온 유럽의 금이 아시아로 빠져나갔다. 이 유통 단계를 혁신한다면 엄청난 돈을 벌 터였다.
명나라가 관을 닫고 나라의 문을 잠갔다. 당시 명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경제 규모가 컸다. 중국이 비단, 종이 등 온갖 물품을 생산하는 세계의 명품 산지였다. 동아시아의 교역도 명나라 상인들이 장악했다. 상업으로 큰돈을 버니 힘들게 농사짓는 자가 없었다. 명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지만, 상비군인은 13만 명뿐이었다. 중앙아시아 초원의 훈, 돌궐, 동북아시아의 거란, 여진, 남쪽 왜구를 막아내기도 어려울 터였다. 영락제가 파견한 정화의 함대는 벌써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케냐와 아덴만까지 항해했었다. 장수가 탄 배는 길이만도 137m로 엄청난 크기였다. 함선 60여 척에 승선원들만도 2만 7,800명이었다고 한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에 도착했을 때 탄 산타 마리아호는 길이가 30m. 명나라의 항해술은 세상의 모든 바다를 장악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명나라가 폐관하고 쇄국했다. 모든 외부 세계와 교역을 철저히 금하고 농업생산을 유도했다. 명나라의 폐관 쇄국으로 유럽 상인들은 크게 타격을 입혔다. 이 시기에 건국한 조선은 '대명천지'라며 명을 따라 쇄국했다. 고립되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에게 항구를 개방한 왜는 유럽의 문물을 그때부터 받아들였고 곧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