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팔로스
팔로스
보쉬가 대표작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Tuin der lusten>을 그리던 1485년. 카디스보다 더 대서양 쪽으로 치우친 항구 팔로스Palos. 남자가 배에서 내렸다. 석호 항은 대개 수심이 낮다. 그러므로 작은 항구다. 팔로스도 그랬다. 한 손으로 어린 아들 손목을 잡고, 또 다른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의 가방은 낡았다. 여기저기 돈을 찾아 세상을 헤집고 떠돈 그의 정신만큼이나 닳고 닳았다. 가방에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가 들어있었다. 스페인 남부 어느 땅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처럼 팔로스도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올리브나무는 로마화, 기독교화의 상징이다. 고기잡이 작은 마을에 갑자기 뱃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두고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세력과 포르투갈이 싸움을 벌였는데 스페인이 이겼다는 소문이 이 작은 항구마을에도 파고들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데 스페인 뱃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론도 함께 들려왔다. 아프리카에 대한 독점교역권을 스페인이 포르투갈에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스페인은 오직 카나리아만 얻는 것으로 국한되어서 스페인 뱃사람들은 이제 노예와 황금이 있는 아프리카로는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왕들끼리의 협정일뿐이었다.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 돈은 제 갈 길을 스스로 알아 흘렀다. 영토 안의 모든 것은 국왕의 소유물이고 재산. 국왕의 허락 없이는 배 한 척도 띄울 수 없었다. 세비야와 카디스 같은 큰 항구에서는 아프리카로 가는 배를 띄울 수 없었다. 팔로스처럼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항구가 국왕 몰래 배를 띄우기에는 더 좋았다. 검은 노예를 많이 살 수 있을 기니 앞바다는 멀었다. 뜨거운 적도선 아래 바다로 들어가는 일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물론 지구가 네모나서 바다 끝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말을 믿는 뱃사람들은 이미 없었다. 뱃사람 중에 세상의 끝을 보았다는 자는 아직 없었다. 이때보다 200~300년 전에 지구는 둥글다는 생각이 널리 알려졌다. 그래도 아직은 적도선 아래로 남하하는 일은 분명히 겁나는 일이었다. 두려움을 촉진하는 축은 기독교였다. 공포는 종교를 낳았고 종교는 다시 공포를 낳았다. 콜럼버스 시대에는 종말론과 그리스도 재림을 믿는 기독교 성직자나 화가들이 바다가 끝나면 절벽으로 떨어진다는 신화를 아직도 믿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예수의 손발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이르는 순간 떨어져 죽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다에 발을 딛고 사는 뱃사람들은 죽는다면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고, 폭풍에 배가 부서져 죽지, 지구의 바다 끝 절벽에서 떨어져 영원한 어둠 속으로 빠져 죽을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는 뱃사람은 그때 이미 없었다.
그 시절에 대서양 난바다의 일을 아는 뱃사람들은 스페인에서는 오직 팔로스에만 있었다. 바다에서 물과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포르투갈 배들과 벌이는 싸움이었다. 포르투갈이 독점해서 실어 오는 노예선을 팔로스 뱃사람들이 해적질했다. 그러므로 팔로스에서는 먼바다에 대한 전문가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도 레콘키스타는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이미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았다. 인도양에 접어들어 아프리카 동부 연안을 따라 북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제 곧 장로 요한의 기독교 왕국을 찾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스페인이 오히려 포르투갈에 포위되는 형국이 될 터였다. 서로 멀리 동떨어져 있다고 여기던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가 이제 곧 하나로 연결될 듯했다. 변혁이 임박하고, 위기감이 짓누르는 시대였다. 스페인은 식민지 정복에서 포르투갈에 비할 수 없이 뒤처졌다. 스페인 왕실은 포르투갈에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초조해했다.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에서 출발한 작은 배를 타고 스페인 팔로스항에 내렸을 때, 그때가 바로 이럴 때였다. 그의 짐 가방에는 사업 제안서가 들어있었다. 어떻게 스페인 왕실에 선을 대서 접근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은 꽉 찼다. 대서양을 서쪽으로 가로지르면 단 며칠 만에 지팡구와 가타이에 도착할 수 있다고 계산한 콜럼버스의 항해계획과 사업 제안서는 이미 포르투갈 왕실에서 퇴짜를 맞았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에서 아시아까지의 항해 거리를 700 레구아 약 6,000km로 제시했었다. 그것이 너무 짧다고 평가되었고 전혀 실현성이 없는 허무맹랑한 계획이라며 비웃음을 샀다. 또 포르투갈 왕실은 금으로 덮였다는 지팡구라는 나라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 포르투갈은 이미 남쪽으로 아프리카를 거쳐 인도양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침 바르톨로메 디아스의 배가 포르투 항으로 들어왔다.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서 되돌아왔다. 완벽한 금의환향이었다. 콜럼버스의 사업계획을 믿지 못하는 마당에 콜럼버스의 어설픈 계획에 한눈팔 이유가 없었다. 바르톨로메 디아스의 입항 소식은 쐐기가 되었다. 포르투갈 왕실은 콜럼버스에게 퇴짜 통보를 했다.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팔로스의 비린내 나는 좁은 골목길을 걷는 콜럼버스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스페인이 아니라면 프랑스에도 가볼 요량을 했다. 그마저도 안 되면 영국 왕실에도 제안서를 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때 프랑스나 영국은 스페인에 비하면 역량이 한참 아래인 형편이었다. 사실상 스페인이 마지막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