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크리스토퍼
크리스토퍼
성 크리스토퍼는 서기 후 3세기에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진 전설 속 인물이다. 전설은 이렇다. 그는 무서운 얼굴을 가진 거구의 가나안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왕을 섬기겠노라. 결심하고 사마리아의 어느 왕을 찾아갔다. 그의 괴력을 본 왕은 흡족히 여겨 그를 궁정에 두었다. 어느 날 궁정에서 어릿광대가 연기를 하는데 악마 이야기를 하자 그 왕이 악마가 두렵다고 했다. 악마가 왕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한 그는 악마를 섬기려고 궁을 나왔다. 그러다 악마가 그리스도를 무서워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이제 그리스도를 찾아 돌아다녔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수행자에게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를 찾아 섬길 수 있는가 하고 물었더니 금식하고 기도하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금식만은 못하겠다고 했다. 수행자는 당신은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니 위험한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을 도와주시오. 그것도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크리스토퍼가 큰 강가에 앉아 강을 건널 사람을 기다렸다. 한 어린아이가 강을 건너러 다가왔다. 크리스토퍼가 아이를 등에 업고 강에 들어갔다.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고 소용돌이치더니 어찌 된 일인지 어린아이가 천근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어찌어찌 무사히 강을 건넜다.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 때문에 내가 아주 위험했어. 네가 어찌나 무거운지, 이 세상을 다 업은 무게보다 네가 더 무겁다고 생각될 정도였다니까.” 그랬더니 이 어린아이가 대답하기를 “너는 온 세상을 옮겼다. 그리고 그 세상을 창조한 바로 그분을 네가 짊어졌다. 내가 바로 너의 왕 그리스도다. 네가 강가에서 찾던 바로 그분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 아이는 홀연 사라져 버렸다. 그날 이후로 크리스토퍼는 기독교를 전도하며 살았다. 어느 왕이 그를 붙잡아 놓기 위해 아름다운 여자들을 붙여주고 또 많은 돈을 주며 이교 신을 숭배하라고 권유했지만, 그것을 거부한 그는 처형당했다. 크리스토퍼 이야기는 동방정교의 성서에 기록될 정도였고, 그리스에서는 6세기에, 프랑스에서는 9세기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더니 13세기에는 <황금 전설 Golden Legend>이라는 중세 유럽의 전설 모음집에 편찬되기도 했다. 이 책에는 백마 탄 기독교도 기사가 용을 찔러 죽여 이겼다는 투의 중세 무협 이야기가 많이 채록되어 있다. 이 시대는 떠돌이 후글라르들이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기사들 영웅담을 들려주며 먹고살던 시대였고 기사 무협은 후글라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감이었다. 전설 책에 엮어질 만큼 유명한 이야기를 콜럼버스가 놓쳤을 리 없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은 여럿이다. 스페인에서는 그를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이라 하고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그의 고향 제노바에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라 불렀다. 콜럼버스의 손을 잡고 팔로스를 걷던 아들은 아버지 성이 원래 콜롬보였는데 스페인식 발음에 맞춰 콜론으로 바꾸었다고 썼다. 아바나의 콜론 대성당을 제노바식으로 부른다면 콜롬보 대성당이 되는 것이다. 제노바는 베네치아와 지중해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할 만큼 동방 무역의 중심지였다. 동방 무역의 최대 아이템은 물론 향신료였다. 상업 도시답게 이 도시의 수호성인은 교통과 운송, 항해, 상업을 수호해 주었다. 여행자들의 안전과 돈을 수호해 주는 그 성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다. 중세 말 프레스코 종교화 거장 핀투리키오Pinturicchio는 어린 예수를 어깨로 업은 성 크리스토퍼를 그렸다. 콜럼버스의 1차 항해 20년 전인 1471년의 일이다. 크리스토퍼 성인이 콜럼버스의 운명도 수호했다. 콜럼버스는 크리스토퍼로 이름을 바꾸었을 때는 이 그림이 그려진 다음이다. 콜럼버스는 자신을 크리스토 페렌스Christo Ferens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를 짊어져 옮겨준 자라는 의미다. 핀투리키오의 그림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크리스토퍼 성인, 그리고 돌로 가슴을 치는 비쩍 마른 노인 성 예로니모가 등장한다. 예로니모는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부신학자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트리니다드Trinidad 즉 성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성인이다. 핀투리키오는 중세 말 유럽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세 인물을 그렸다. 신대륙을 오가는 동안 콜럼버스는 크리스토퍼 성인처럼 자신이 새로 발견한 땅에서 이교도 선주민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난 자라고 믿었다. 그가 예수를 전하는 방식은 선주민을 모두 죽여 없애거나 노예 삼아 황금을 캐는 일이었다. 노예로 부리다 죽여 없애면 이교도가 없는 깨끗한 땅이 된다고 여겼다. 그런 곳이어야 새로운 예루살렘을 세울 땅이라 할 수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성노예로 팔아 돈을 챙겼다. 가톨릭 교리는 신자를 노예로 삼을 수 없었으므로 콜럼버스는 인디오들에 세례를 금지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자그마치 100만 명이었던 히스파니올라 인구가 그가 도착한 지 20년 만에 단지 6만 명만이 남았다. 그가 그리스도를 업어 옮겨 생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