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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엘 미나

3. 엘 미나

#052. 사명

by 조이진

카스티야 고원의 겨울은 차갑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마드리드에서 가까운 옛 도시다. 이름에 모슬렘의 흔적이 물씬하다. 1486년 1월 콜럼버스가 이곳으로 찾아가 국왕을 알현했다. 레콘키스타 전쟁 동안이었으므로 왕실은 전선을 따라 여기저기로 캠프를 이동했다. 여기서 콜럼버스는 국왕 부부에게 스페인으로부터 750 레구아legua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넓은 땅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콜럼버스는 황금으로 뒤덮인 땅 지팡구까지 무려 6,500m 정도를 항해하면 도착한다고 설명한 것이다. 이베리아 남단 지브롤터 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이 14km인데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까운 거리에 아시아가 있다고 계산했다. 콜럼버스는 인도와 가타이까지 3,900km만 가면 된다고 계산했다. 오늘날 과학으로 잰 거리는 대략 20,000km다. 이 제안서를 검토한 특별위원회의 의견은 달랐다. 스페인과 지팡구 사이에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라는 큰 땅덩이가 한데 모여있으므로 지구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반대편에도 그에 맞먹는 큰 대륙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대륙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아시아로 바로 가는 항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더라도,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지구 균형을 위해 큰 대륙이 가운데 놓여있다는 그들의 견해는 맞았다. 정말 아메리카 대륙은 지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땅이 쪼개져 생겨났을까? 콜럼버스의 어설픈 계획안은 위원회에서 부결되었다.

다운로드.jfif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이베리아의 정중앙에 있어서 로마에 이어 모슬렘이 8세기부터 점령했다. 오직 대학만이 들어서도록 건설된 세계최초의 도시며 세르반테스가 태어난 곳이다.

그러나 왕실의 생각은 달랐다.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놓고 대결을 벌였던 이사벨라 왕실은 포르투갈이 약진을 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연안을 돌아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서 벌써 인도에 오가며 아프리카의 금과 아시아의 향신료를 직접 이베리아로 가져오고 있었다. 반면 스페인 왕실은 레콘키스타 전쟁을 치르느라 국고를 소진했으므로 새로운 땅을 찾는 일에 투자할 여력은 없었다. 국왕 부부는 결론을 미룬 채 그를 붙잡아두고만 있었다. 콜럼버스는 그의 동생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 왕실에도 벌써 똑같은 제안을 넣어두었다. 부유한 스페인 귀족에게도 개인적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제안서도 보내두었다. 스페인 귀족들은 국왕의 포기가 확실하면 자신들이 투자하겠다고 약조했다. 콜럼버스에게는 극적인 반전이 필요했다. 이때는 레콘키스타의 마지막 전장인 그라나다 공격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이때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모슬렘 술탄이 스페인 왕실에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모슬렘 세력에게 그라나다는 이베리아반도의 최후의 거점이자 교두보. 만일 그라나다에서 모슬렘을 몰아내면 예루살렘에서 기독교도들을 몰살하겠다는 보복계획을 알려왔다. 그때 예루살렘은 이집트 술탄의 지배 아래 있었다. 모슬렘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적개심과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진실의 순간'이 임박했다. 콜럼버스는 이 상황을 즉시 활용했다. 자신이 아시아로 항해해 유럽의 반대편에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겠다는 생각을 제안서에 덧붙였다. 그는 자신이 십자군이자 전도사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그 땅에서 시작하여 전 인류를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단자와 불신자에게는 십자군을 보내 진멸함으로써 새 그리스도 시대를 열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이 ‘예수를 짊어져 옮긴 자’가 스스로 부여한 사명이었다.


+ leagua는 당시 항해술의 거리 단위. 1 레구아는 8.4m 정도라고 하는데 학자마다 다르게 계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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