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미니 카니스

#063. 아우토다페

by 조이진

아우토다페

우두머리 심문자가 짧은 몇 마디로 선고를 마치면 칼을 찬 사제들이 장작더미를 져왔다. 의식을 진행하는 촛불이 켜지면 목에 밧줄이 걸린 이단자의 머리 위로 죄수임을 상징하는 노란 고깔모자 같은 씌우개가 덮였다. 장작을 나른 사제들이 나가면 창을 꼬나 쥔 사제들이 이단자의 곁에 섰다. 그 창은 미늘창이었는데 이단자가 날뛰든지 도망할 때 죽이지 않고, 제압하여 붙잡아두기에 미늘이 마땅했다. 어떤 이유든 빨리 죽이는 것은 죽는 자들에게 은혜로운 일이 되는 것, 사제들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준비가 끝나면 모자 달린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입장해서 회개하라는 간단한 설교 말을 내뱉고, 부디 이 자를 주께서 구원해 주십사 하고 영혼 없는 메마른 기도까지 마무리했다. 기도가 끝나면 느린 박자에 아주 작은 소리로 드럼을 두드린다. 무어인이 이베리아에 가져온 케틀드럼이 이 이벤트에서 효과음으로는 제격이었다. 솥뚜껑을 뒤집어서 짐승 가죽을 대 두드려 소리를 내는 이 악기를 개량하여 팀파니라고도 불렸다. 드럼 소리가 커지고 빨라지면 사람들의 흥분도 절정에 올랐다.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으면 추기경이 목을 끄덕였다. 살을 태우는 냄새가 광장을 채웠다. 성난 코브라가 치켜든 머리처럼 추기경은 대열의 맨 앞에 서서 길게 행렬을 이끌고 거리를 행진했다. 그의 뒤에는 도고 카나리오 도미니크 사제단이 따랐다. 사제단을 뒤따른 흥분한 군중들은 유대인의 집을 약탈했다. 여자는 강간했다. 사제단은 구호를 외치듯 성경의 시편을 따라 외었다.

An_auto-da-fé_of_the_Spanish_Inquisition_and_the_execution_o_Wellcome_V0041892.jpg 이사벨라 여왕은 이단자를 식별하고 공개 참회시키기 위해 '신앙의 행위' 아우토다페를 실행했다.

가톨릭 사제들의 가학성은 스스로 학습하고 강화되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바로 불에 태웠다. 낮은 불에 천천히 태우는 방법이 고안되기는 했어도 단순한 화형식이었다. 그러다 은총을 베풀어주는 새로운 방법이 추가되었다. 교수형으로 거의 숨이 끊어질 때 올가미를 풀어주었다. 숨을 회복할 만할 때 장작에 불을 피워 태웠다. 그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는지 신부들이 직접 장작더미에 올라 손으로 목을 졸랐다. 이때도 죽을 만한 순간이 되면 사제는 손을 풀어 잠깐 숨 쉬게 해 주었다. 그리고 불에 태웠다. 심문하는 곳이 아닌 화형식장에도 도구가 등장했다. 뜨겁게 불에 달군 큰 펜치로 사지를 잡아 찢었다. 하나씩 뜯겨 나온 팔다리를 불더미에 던져 구웠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이베리아누스가 세비야에 이탈리카를 건설하고 세운 콜로세움의 검투사 싸움도 이보다 관중을 흥분시키지는 못했다. 입장료는 안 받았지만, 가톨릭 사제들이 어떤 구경거리보다 더 대중을 열광적으로 몰아간 공연자들이었다. 그들은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을지, 잔인함을 보여줄 또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을지를 늘 고민했다. 환호와 탄성 그리고 야유 가득한 광장, 죽음을 태우는 축제의 집행자들. 공연장인 세비야의 대성당 광장은 또 다른 로마 콜로세움이었다.


기독교인으로 위장한 유대인으로 판정된 콘베르소들은 이제 돌로 된 십자가에 묶여야 했다. 생각해 보니 굳이 십자가를 나무로 만들어 써야 할 이유도 없었다. 돌 십자가는 덜 번거롭고 경비도 줄일 수 있었다. 나무 대신 넓은 돌 판자로 무대를 세워 교수대로 썼다. 사람을 태우는 방식도 발전했다. 가톨릭 사제들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읽을 수 있었다. 사제들이 서기전 4세기경 시칠리아 왕이 사람을 죽이던 방법을 찾아냈다. 시칠리아 왕은 청동으로 된 큰 가마솥에 죄인을 가두고 불에 구워 죽였다. 그것도 낮은 불로 천천히 오랫동안 구웠다. 청동으로 만든 성당 탑의 종처럼 청동 가마솥은 공명효과로 증폭되어 소리가 크게 울렸다. 구워져 죽어가는 자의 외침이 가마솥 안에서 증폭되어 광장에 널리 멀리 오래 퍼졌다. 아라곤 왕 페르디난드는 당시 시칠리아의 왕이기도 했다. 그가 이런 기법을 스페인으로 가져왔다. 스페인에서는 불에 구워 죽여야 할 이단자가 많아 청동 솥을 다 갖출 수는 없었다. 돌을 깎아내 관을 만들었다. 돌 관에 이단자를 넣어 덮고 서서히 약한 불에 구웠다. 관의 면마다 이제 곧 종말이 닥친다는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적혀있었다. 세비야 어디서든 웬만한 공터라면 죽을 자를 기다리는 이 관을 볼 수 있었다. 화염이 널름대고 악마를 태운 재와 거무튀튀한 연기가 하늘로 오를 때 군중들은 시편 찬송을 불렀다. 한두 개의 드럼이 화형식의 배경음악을 맡았다. 이 어두운 시기 스페인에서 음악이란 이게 다였다.


콜럼버스가 탄 배가 출항하기 10년쯤 전인 1481년 2월 6일 아침, 흐린 하늘을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광장을 둘러싼 돌벽을 울렸다. 음산했다. 나무로 된 무대 만드는 소리였다. 세비야 광장에서 재판과 심문으로 시끌벅적한 날이야 흔했어도 이날은 인간의 행사 개념을 새로 바꾼 날이었으므로 흔한 날의 아침은 아니었다. 간단했지만 높은 단을 둔 가설무대 stage라는 것이 처음 만들어졌다. 세상의 첫 단상 무대는 가톨릭교회가 고안했다. 화형식 행위를 더 극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화형식을 높은 무대 위에서 진행하면 무대를 둘러싼 많은 군중이 멀리서도 화형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높은 무대만으로도 더 많은 군중을 행사에 몰입시킬 수 있었다. 군중은 흥분했고 산 자의 열기는 시체만큼이나 뜨겁게 달았다. 무대에서 치르는 화형식은 공연이 되었다. 피 타는 냄새와 죽어가는 소리는 오감을 자극했다. 세상에 처음 등장한 신개념의 극장식 무대에서는 춤과 노래, 연극이 아니라 전투가 벌어졌다. 선과 악의 대결, 종말이 임박한 세상을 구원할 어둠의 투사와 적그리스도의 싸움이 벌어졌다. 무대는 양가죽을 쓴 이리들을 기독교인들이 집단 살상한 행사였다. 이 무대에서도 늘 선이 이겼다. 광장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증오와 희열이 공존했다.


그리스도의 은총인 세례를 받았어도 여전히 배교자로 의심할만하다면 그런 악의 무리를 심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자 기독교인의 사명이었다. 그래서 이 화형식을 “신앙의 행동”이라고 했고 스페인어로 아우토다페라 했다. 화형식 무대 아래에 악기를 연주하는 한 무리의 밴드를 배치했다는 점도 새로운 형식이었다. 높은 무대에 연기자가 있고, 그 아래 낮은 곳에 배경음을 연주하는 밴드가 있는 배치는 무대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같이 시작되었다. 아우토다페를 주관한 연출자는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를 국왕 부부에 이어 스페인의 3번째 국왕이라 불렀다. 그가 심문관 자리에 앉으면 검은색이나 하얀색 고깔을 써 얼굴을 가린 자들이 맨발로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들의 목에 올가미가 느릿하게 걸렸다. 행사가 빨리 끝나면 관객들이 실망할 것도 문제였지만, 고통의 시간이 줄어들 터였다.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모든 진행 절차를 되도록 느린 속도로 진행했다. 느릴수록 디테일은 더 잘 살아난다. 더디게 진행할수록 관중들은 어서 밧줄을 당기라고 졸라댔다. 열기는 고조되어 갔다. 추기경이 보기에 이렇게 관중들이 열광하는 광경이 흡족했다. 심문 행사를 알리는 깃발은 이제 곧 교수형으로 축 늘어질 콘베르소의 몸처럼 생기 없이 처졌다. 무대 가운데는 십자가가 서 있고, 십자가 옆구리에는 용서와 화해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뭇가지가 몇 가닥 걸렸다. 그리고 영원한 정의를 상징하는 칼 한 자루가 십자가에 기대어 놓였다. 십자가가 선 무대 바닥에는 “일어나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리라!”라는 문장이 십자가를 빙 둘러 장식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시편 73:27절이 형 집행장의 분위기를 잡는 구호였다. 사제가 선창하고 군중들이 따라 했다. 따라 외는 혀의 굴림도 자연스럽고 호흡도 좋았다. 의미는 행사 취지에 딱 부합했으니 더없이 잘 어울리는 시구였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는 예수의 말을 외는 자는 없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4. 도미니 카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