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대화
대화
다음날 40명 남짓 탄 큰 카누 한 대가 콜럼버스의 배에 다가왔다. 이 지역의 왕인 가시관과 호위하는 부하 몇 명이 금을 가져와 모래사장에 내렸다. 콜럼버스 생각에 그들이 금을 가져와 어떤 흥정을 하러 왔다고 여겼다. 그들과 함께 온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카누에 차분히 앉아 있었다. 이 자세는 자신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을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이 지역 가시관이 콜럼버스를 대면했다. 신분 낮은 백성과 달리 가시관은 콜럼버스를 대하면서도 당당했다. 다음날 다시 가시관이 왔다. 콜럼버스는 가시관이 금을 가져오는지 궁금했다. 수백 대의 카누가 다가왔다.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왕을 수행하는 자들이 200명이 넘고, 왕은 걷지 않고 네 명이 받쳐 맨 가마를 타고 위엄 있게 오고 있다고 했다. 왕은 늙지도 않고 아직 젊은 사람인데도 말이다. 가마가 콜럼버스의 배 근처에 도착하자 가시관은 잠시 멈추어 쉬더니 모든 수행원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이 장면을 콜럼버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국왕 폐하께서도 이 가시관의 품격과 존엄함을 잘 헤아리실 것입니다. 비록 그는 아무것도 입지도 걸치지도 않고 다니지만 말입니다. 그가 배에 올라왔을 때 저는 뱃머리 아래에서 식탁에 앉아 식사 중이었습니다. 그는 당당하지만 겸손한 태도로 곧장 제 곁에 와 나란히 앉았습니다. 제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서려 하자 일어나지 말라는 듯 말리면서 어서 하던 식사를 계속하라고 권했습니다. 식사하다 중단하면 안 된다면서 말입니다. 선실로 안내했을 때 그는 부하들을 밖에서 대기하라 명했습니다. 부하들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즉시 왕의 명대로 행동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그렇게 공손한 모습을 여태껏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갑판에 열을 맞춰 앉았고, 나이 든 두 명만이 왕을 곁에서 수행했습니다. 제 추측에 한 명은 책사 같고, 한 명은 경호를 맡은 자인 듯합니다. 그들은 왕이 의자에 앉자 그 아래에 내려앉았습니다. 제 생각에 그들이 우리의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 하는 듯하여 즉시 먹을 것을 내오도록 했습니다. 음식을 내오자 왕은 딱 한 입만 맛보더니 밖에 대기 중인 부하들에게 음식을 모두 미뤄주었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모두 먹었습니다. 음료를 주어도 왕의 행동은 같았습니다. 먼저 한 입 마시고는 곧장 바깥의 부하들에게 보내서 전부 마시게 배려했습니다. 이 작은 일에서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놀랍도록 절도 있게 이루어졌습니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해와 익숙한 의식을 치르듯 했습니다. 왕의 말을 제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왕이 한 모든 말은 아주 판단이 정확하고 의사 표현이 명료했습니다. 그를 수행한 두 명의 책사들은 왕에 대해 깊이 예의를 갖추어 왕을 모셨고, 왕에게 의견을 말했고, 왕 대신 우리에게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가 간단하게 음식을 먹는 동안 책사가 어깨띠belt 같은 것을 가져와 우리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모양으로는 카스티야의 벨트들과 같지만,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저에게 선물로 내놓았습니다. 두 개의 금장식품도 함께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금의 두께는 너무나 얇았고,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가진 금은 아주 적은 양이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이 엄청난 양의 금이 나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 저는 믿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가 제 침대에 놓인 쿠션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에게 제가 목에 걸고 있던 호박 목걸이와 함께 쿠션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빨간 슬리퍼 몇 개와 오렌지 꽃잎으로 우린 물이 들어있는 유리병도 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좋아했습니다.
왕과 두 명의 책사들은 자기들이 저와 완전히 말이 통하지 못했음을 너무너무 미안해했습니다. 저도 물론 그들의 말을 얼마 알아듣지 못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만일 이 섬에 제가 원하는 것이 없다면 이 섬은 내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도 말해두었습니다. 제가 폐하를 늘 마음에서 잊지 않기 위해 폐하의 초상이 새겨진 금 몇 닢을 지갑에 지니고 다니는데, 그것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분이 나의 폐하이시고, 이분이 나의 왕이시고, 이분이 세상의 가장 넓은 영토의 지배자이시고, 이분보다 더 큰 땅을 지배하는 왕은 세상에 없다고 분명히 말해두었습니다. 폐하의 왕실 깃발도, 철십자 크로스 파테cross pattée 깃발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아주 경이로이 여겼습니다. 그가 자기 참모들에게 말하기를, 저 먼 하늘에서 여기까지 저를 보낸 것을 보면 폐하는 아주 무서운 하늘의 왕임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서로 상대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너무 다른 두 문화가 만나서 ‘대화’를 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듣고 싶은 대로 들었다. 이 글은 콜럼버스가 쓴 대화록이다. 이 문장 속에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다이노 가시관의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이 대화록을 통해 우리가 엿볼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콜럼버스가 식사하는 동안 배에 오른 가시관이 콜럼버스가 손님을 맞으러 일어나려 하자 극구 만류하며 식사를 계속하라고 권하는 장면이다. 방해받지 말고 어서 식사를 계속하라고 한 것이다. ‘하필이면 당신이 식사 중이실 때 제가 찾아와서 식사를 방해했군요. 참으로 미안합니다. 그러니 저를 신경 쓰시지 마시고 어서 식사를 마저 다 하세요’라는 의사였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이들이 어깨띠를 선물로 내놓은 일이다. 어깨띠는 다이노 사회에서 오직 가시관들만이 차는 물건이었다. 가시관은 정치적으로는 왕이었고 종교적으로는 제사를 주관하는 당주이기도 했다. 그런 가시관은 하늘에 있는 조상신에서 대대로 이어져 오는 장자가 맡았다. 그러므로 이 어깨띠는 조상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가시관의 집안에 설치된 가내caney라는 사당에 모셔두었다. 그래서 하늘 신에 올리는 제례 의식에서는 물론이고 군장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회의 때 이 어깨띠를 맸다. 가시관은 하늘의 뜻을 물어 받은 결정 사항을 귀족들인 니다이노Ni-Taino들에게 선포할 때도 이 어깨띠를 맸다. 그럼으로써 의사결정의 신성함과 가시관의 권위를 상징했다.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일종의 옥새인 셈이다.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깎아 둥그렇게 파낸 어깨띠를 찼다. 면 생산 능력이 좋아지면서 면으로 된 어깨띠를 만들었고, 금박 판 위에 옥 같은 보석을 깎아 박았다. 어깨띠에는 왕을 상징하는 새나 동물의 이미지를 새겨 넣었다. 그 이미지는 씨족을 상징하는 새, 곰, 용과 같은 토템 상징들이어서 씨족 가문마다 달랐다. 금박 판에 보석으로 문양을 새겼다. 멀리서도 가시관이 움직이면 햇빛을 받아 어깨띠가 번쩍번쩍 빛났다. 더운 땅이라 치렁치렁하게 옷을 입지는 않았어도 왕은 돌로 된 어깨띠만으로도 하늘의 아들이라는 신성과 다이노 민족의 임금이라는 힘과 권위를 상징할 수 있었다. 옥새가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 있어야 가시관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어깨띠는 가시관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기물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권력의 경쟁자들이 훔치거나 빼앗으려 노리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돌로 만들어 오래된 어깨띠 거나 위대한 가시관들이 대대로 사용한 어깨띠일수록 더 강한 신성을 지닌다고 믿었다. 어깨띠는 동맹을 추진하는 다른 가시관에게 신뢰를 상징하는 선물로 주기도 하는 중요한 상징이기도 했고, 동맹 가시관의 장례식에 부의로 보내는 물품이기도 했다. 그렇게 중요한 신물인 어깨띠이다 보니 외부로 보내지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가시관이 어깨띠를 콜럼버스에게 선물한 것은 콜럼버스의 말처럼 다이노들이 그를 하늘이 보낸 신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콜럼버스를 만나고 있는 가시관은 구가나가리Guacanagari라 불렸다. 구가나가리는 히스파니올라섬의 서쪽을 다스리는 지방 왕이었다. 그 또한 ‘하얀’ 얼굴을 한 저승사자가 사람을 죽음의 세계로 잡아간다는 다이노의 신화관을 가졌다. 다이노 말로 하얀white 얼굴은 창백한 얼굴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다이노 신화에서 그레이트 칸의 사자는 핏기도 온기도 없어 얼굴이 허옇고 무표정하다. 다이노 눈에 콜럼버스의 얼굴은 하얗게 보였다. 창백하다고 보였다. 마치 죽은 자의 살처럼 핏기도 없고, 온기도 없다고 보였다. 다이노들이 기독교인들의 얼굴을 만져본 것은 정말 온기가 없는지 확인하려는 행동이었다. 다이노들은 그레이트 칸이 저승사자인 콜럼버스를 이 섬으로 보냈다고 이해했다. 그러므로 그레이트 칸의 절대성을 존중하며, 저승사자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의사로 씨족 공동체와 가시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어깨띠를 콜럼버스에게 바쳤을 것이다. 수십 명의 저승사자가 큰 배를 세척이나 타고 왔으니 다이노 족 멸문의 재앙이 닥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가시관은 왕의 어깨띠를 바쳐서라도 자신의 씨족 공동체를 살리려 했을 것이다. 몇 년 뒤 드러난 일이지만 이날의 어깨띠는 굉장한 외교전의 선물이었다. 이 섬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지방 왕인 가시관이 있었고, 섬 중앙에는 가온아보Caonabo라는 가시관이 있었다. 가온아보 가시관은 자신이 담당한 중앙 지역을 직할 통치하면서도 네 지방 왕을 아울러 통솔했다. 5개 지방이 연방제로 자치권을 가지면서도 가온아보가 섬 전체를 다스리는 왕 중의 왕이었다. 섬의 서쪽 지방을 담당하는 구가나가리 가시관이 이날 콜럼버스와 일종의 동맹을 추진하려 했다. 이날의 외교를 통해 세력이 약한 자신을 대신해서 콜럼버스 일행에게 중앙의 가온아보를 저승으로 잡아가달라는 부탁도 함께 했다. 콜럼버스의 출현으로 히스파니올라섬의 다이노 정치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개입으로 다이노 사회는 이제 내전으로 향하게 될 것이었다. 전 세계 외교사에서 이토록 기상천외한 외교 현장이 또 있었을까. 신화 속 존재로 받아들여진 저승사자와 현실 정치가 뒤엉킨 이상한 외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난해한 외교전은 구가나가리 가시관 자신과 다이노 전체의 운명뿐 아니라 카리브와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 세계사의 역사를 바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