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1

#03 안 괜찮아도 괜찮아

by ㄷㄹ


두려움에서 비롯된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십 대 중반에 다다른 나이에 마음으로 믿었던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혼자 그럭저럭 괜찮게 지냈습니다. 괜찮을 줄 알았고 괜찮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묵직한 나무처럼 옆을 지켜줬던 그. 힘들 때는 그에게 기대었고 쉬고 싶을 땐 그의 그늘에서 쉬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나를 웃게 해 주던 그. 답답할 때면 그에게서 벗어나 혼자 돌아다니다 그가 그리워지면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는 항상 거기에 있는 나무였으니까요. 뿌리가 썩어 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간신히 서있는 건지도 모르고 더 이상 노래를 불러 주지 않는다며 투정만 부렸고, 잎을 떨어트린 가을 나무가 되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며 섭섭해하기만 했습니다. 그가 물을 필요로 할 때, 그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서서히 그는 겨울나무가 되어갔고 기다리면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봄이 올 줄 알았었는데 그는 겨울나무가 아니라 시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나의 무관심 속에 시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7년간의 우리는 서서히 하지만 한순간에 이별을 맞이했습니다. 이별 한 후로 최대한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루 동안에 어떠한 틈도 허락하지 않은 채 지내왔습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지내온 몇 개월 뒤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을 만나기 바로 며칠 전 친구들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던 이상형의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백마 탄 왕자를 찾는 게 오히려 쉽겠다며 평생 남자 못 만나겠다고 일소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타났고 한눈에 그 사람에게 빠져버렸습니다. 그 사람도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그 사람과 나는 만남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 만에 결혼을 약속하고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미래를 계획했습니다. 주위의 친구들도 부모님도 의아해했습니다. 너무 성급하지 않느냐고,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고. 모두가 하나같이 말렸습니다. 사랑은 원래 이런 거 아니냐며 사랑에 대해 온갖 알은체를 하고 이번 사랑에 대해 확신했습니다. 누구는 활활 타오른 불꽃은 순식간에 꺼져버린다고 하면서 천천히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뭐에 홀렸었는지 주위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를 온전히 받아 줄 사람이 또 있을지 무조건적인 나의 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그 사람이 나타났고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랬는지 사랑의 감정이 크게만 느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시작된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연의 일치를 운명으로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은 지나고 보면 다 그런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했었던 건지 아니면 이제 그만 혼자 살아가기 지쳐 있던 내 마음이 기댈 곳이 필요했는데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난 그 '상황'을 사랑했었던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외적인 미에 속아 그 사람의 마음결을 보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자책합니다. 그럴 줄 알았냐 만은 그래도 나의 선택이었고 나를 믿었고 그를 믿었고 사랑을 믿었습니다. 사랑을 믿고 싶었던 그리고 혼자가 싫었던 나를 자책합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사랑을 갈구했던 죄, 사람을 너무 믿었던 죄, 현재를 보지 못하고 미래를 바라봤던 죄, 괜찮아질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던 죄밖에 없습니다.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 자신을 책망하다가도 삼 개월 만에 알아차린 게 다행이라고 다독이기를 반복합니다. 지독했던 그 사람의 사랑법. 사람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상식과 예의가 없다고 말할 때 알아챘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눈을 부라리며 소리 지를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술을 먹이고 과거를 들출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문자와 sns와 메일을 다 뒤지고 감시할 때 알아챘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아니면…….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게 마련이지만 그러면서 인생이 살아지고 삶이 이어지는 것이겠지만, 굳이 이런 일로 삶이 이어지지는 않아도 되는데…. 우리가 행복이나 불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불행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언젠가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납니다. 왜 이런 불행이 나를 덮쳤는지 수백 번 생각해봐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그럼 내가 뭘 그렇게 잘못 살아서 그런 걸까 생각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큰 행복이 나를 선택하려고 이런 불행이 나를 선택했던 걸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라도 위로해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저 티브이 속 이야기, 드라마나 소설 속 스치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일이 나의 인생에 벌어지고 보니 마음을 다 잡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닫지 않도록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다시 사랑을 갈구할 수 있도록 그리고 지금의 아픔이 이미 깊게 새겨져 버린 어쩔 수 없는 상처가 앞으로 다가 올 행복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번 일로 더 성숙해질 수 있기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