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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Jan 22. 2017

'헬프' 눈물나게 좋은

폭력 사회에 맞서는 약자'들'

"Courage isn't just about being brave. 

Courage is daring to do what is right in spite of the weakness of our flesh"


책도 영화도 어울리는 시기가 있다. 시기마다 개인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가진 생각이 쉽게 변하지는 않으니, 기본적인 토대는 같을 테지만 그가 습득한 경험이나 처한 환경에 따라 받는 의미는 또 달라지게 마련이다.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과제로 이 영화를 처음 만났다. 다행히 영문학을 사랑해 영문학도가 됐고 기자를 지망하던 나로서는, 주인공 스키터를 프로필 사진으로 지정할 만큼 이 영화를 친근하게 여겼다. 많은 의미를 받았다기보다는 저런 방법도 형태도 있구나 하는 막연한 지지 같은 거였을 테다. 그의 가치도 응원했고 말이다.


수년이 흘러 지난주. 밤새 펑펑 울며 찾아본 이 영화는 다른 의미를 준다.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싫을 만큼 지극히 마초적인 조직 문화에 지지 않겠다고 아등바등 더해내던 나는, 요 근래 그저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너무나 괴로웠고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느라 되레 내 뒤로 숨기 급급한 몇몇을 봤으며, 결국 그 폭력적인 상황에 홀로 오롯이 처한 나를 도울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을 절절하게 알았다. 그 씁쓸함을 맛보면서도 다른 사람들까지 챙겨보겠다고 나서서 편견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적었다. 조직의 마초적 문화는 견고했다.


돌아보면, 꼭 그들의 탓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자행한 나태한 태도 같은 것에 대한 편견이 아래로 이어진 것일 텐데, 그리고 난 그걸 보기 좋게 깨부쉈고. 그런 악습을 좀 타파해보겠다고 마초적 분위기를 없애보겠다고, 내 일이 아닌 것까지 미친 듯이 해냈는데 결국 완전한 내 편은 없는 거더라. 회사에선 가급적 조용한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 내가, 이렇게 마초적인 분위기에 내 커리어를 후려치기 당하고 싶지 않아 나서기 시작한 나에게, 언론사는 원래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그러면서 당직, 회식 같은 건 당연히 하지 않는, 나를 방패막이 삼는 일부의 작태는 내게 깊은 회의감과 혐오만 안겼다.


그렇다고 이걸 그만두겠냐고. 전혀 아니다. 지금껏 해온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잘 해냈다. 내 일에 그런 마초적 문화가 들어와 편견으로 방해하는 이상, 나는 절대 멈출 수가 없다. 그렇게 술자리를 가고 술을 받아마시고 끝까지 따라간다 해도 그들에겐 이미 그 자리에 없는, 도망간, 빠져나간 남성들이 더 우세인 세상. 그들이 일을 잘 한다면 내가 이런 말을 할까? 절대 아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통계치가 있어 그건 말을 못 하니 "너는 아닌데 다른 여자들은 그래" 따위의 말을 해대는 마초적인 분위기. "여자는 그래. 너는 아니야"라는 말로 내 앞에서 면죄부를 들먹이는 행위. 나는 그들에게 동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것은 내 선택이다.


'헬프'는 그래서 내게 깊은 울림으로 다시 다가온다. 이 마초적 분위기 아래 또 다른 편견과 맞서 싸우고 있는 나에게, 스키터가 그런 사례들을 모아 공감하며 있는 모습은 깊이 위로가 된다. 스키터 역시 그러지 않아도 된다. 스키터는 사실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알아도 모른 체해도 된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는다. 밤새 이 영화를 보며 끓는 마음을 위로받고 그렇게 피곤한데도 오지 않는 잠 때문에 괴로워 영화를 곁에 두고 마음을 위안받던 것은 그런 이유다. 스키터는 자신이길 택했지 주변의 끌어내림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스키터가 날카로운 펜으로 곳곳에 스며들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그들의 편에 서 연대의 중심이 되어주었기에 일이 가능했다. 한 마을의 카르텔이 무너지고, 혹은 무너지지 않더라도 그 부조리를 아는 자가 분명히 있음을 가르쳐주는 일. 그건 엄청난 일이다. 당장 바뀌는 게 없을지언정 그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남일에 개입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그런 고루한 말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스키터가 한 건 정의 실현이니까 말이다.


에이블린과 미니의 용기는 스키터의 것보다 더더욱 높이 사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이 투쟁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당장의 생계가 달렸고, 남편의 가정폭력이 따라올지도 몰랐고, 수십 년을 일한 가정에서 몇 분만에 해고되는 일까지 염두해야 했다. 또, 미니를 고용한 셀리아와 그 이후 그들이 한 상에서 치킨을 뜯게 되는 과정. 마침내 미니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 모든 게 눈물 나게 멋지다. 미니를 사람으로 대하고 곁에 두는 셀리아의 선택 같은 것들. 그가 혼자라 그런 선택을 했다고? 과연 힐리였다면 그런 선택을 할까? 절대 아니다. 곱씹을 게 너무나 많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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