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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Feb 04. 2017

기억을 제대로 치료하세요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묵언, 완벽한 대칭, 숨막히는 댄스교습소, 어떤 일이 반복되는 악몽….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이 전체관람가인 데 대해 놀랍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 좋은 영화를 누구나 볼 수 있어야 마땅하지만, 이게 프랑스 영화가 아니었거나 개구리 친구들의 음악이 없었다거나 상징이 좀 더 노골적이었다면 과연 전체관람가였을까? 아무 기대 없이 본 영화에서 뜻밖의 수확을 건져올린 기분이라 심히 기쁘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페레그린과 달리 바로 옆집에 있을 법하게 생겼다. 그곳에 오는 사람들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 구조 또한 매우 매우 평범하다. 그래서 더 설득력 있다. 멀쩡해보이는 주변인들은 사실 저마다의 좌절, 고뇌를 안고 있고 그걸 '나만 예민한가'라고 고민하며 안으로 삭히고 있는 셈이다.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그같은 이들이 찾아와 마음을 터놓는 곳이다. 작물의 힘을 빌려서. 그게 불법인 것은 이 영화에선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개개인의 상처와 그 치유의 과정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상처를 안아준 거대한 나무 같은 프루스트는 소멸한다. 남은 자들의 상처를 안고 "네 인생을 살라"는 조언을 남긴채 말이다.


기억이란 얼마나 왜곡되기 쉬운가. 특히 주인공처럼 두 살의 기억, 사진 몇 장이 전부라면 더더욱 그럴 테다. 과거의 내가 기록을 남기기를 꺼렸던 것과 달리 근래의 내가 내 생각과 감상 등을 이렇게 공개된 공간에 적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 과거의 내가 그런 것 대신 짤막한 단어나 문구를 남기거나 매순간의 사진을 찍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내가 겪었던 감흥을 그대로 되살리기는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분명 그게 어렵지 않았던 순간이 대부분이었는데, 나이가 좀 들었다고 비슷한 기억이 많아진 탓일까 일이 하도 많아서 그런 탓일까 나도 모르게 잊고 있는 자잘한 기억들이 있다.


누군가는 트라우마라는 보호막을 빌려 그 이름을 더럽히기도 한다. 근래 근처에서 일어난 일만 해도 그렇다. 여성 비하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죄의식도 없던 그는 "과거에 알던 여자들이 일을 안 해서 내가 트라우마가 생겨 그렇다"는 해명을 내놨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들어보니 그 기억은 편집된 것이었다. 왜곡의 끝판왕 수준. 그것과 현재의 조직원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을 인지해 "너는 빼고" 따위의 방어막을 만드는 행위조차 꺼리지 않는다.


기억의 편집과 그걸 오냐오냐해주는 마초문화의 폐해에 비명지른 이가 없었다는 것에 놀라웠고 그걸 지적할 수 있는 이들이 이직한 후 그가 유아독존 마초성향으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더 황당했다. 주장대로 트라우마라면 홀로 치유에 힘쓸 일이지 아무 관련 없는 이들에게 여성 비하 발언을 쏟으며 자기위안할 게 아니다. 얼마나 굴곡이 없었다면 개인적 역량 부족에서 온 피해의식이 본인 판단으로 만만했을 여성 동료들에게 표출된 것인지 참 어처구니가 없다. 난 그 만만한 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는 데서 위안을 찾아야 할까.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도 계속 치겠다. 그게 허용되는 조직일 거라고 아직은 믿어보고 싶다.


누군가는 죽음을, 폭력을, 그에 비견하는 위기를 겪고 그 기억에 몸부림친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당시의 기억이 미친듯이 공격해와 두통에 시달리고, 도망갈 곳이 없음에도 기억으로부터 피하려고 별짓을 다한다. 편협한 자가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망수단으로 그렇게 말할 단어가 아니란 얘기다. 프루스트는 트라우마의 기억 현장에 직접 마주하길 종용한다. 그래야만 문제는 해결된다. 트라우마를 가진 이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근원은 바로 그곳에 있다. 그 길만이 그 '머리'의 주인이 살 길인 것이다.


주인공이 그랬듯, 프루스트 같은 이를 우연히라도 주변에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복일까 싶다. 뭐 다른 걸 먹어서 그 기억을 마주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처럼 타인의 상처를 마주해주고 함께 공감해주며 누군가의 잊힌 꿈을 되살려 "그래도 된다"고 말해줄 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 현실 때문이다. 지금은 각자도생, 각자 살기 바쁘지 않은가. 슬프지만 현실이고 그래서 자꾸만 아무에게도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자고 되뇌게 된다. 무섭고 무서운 세상에서 침묵을 지키기란 참 쉽지만 또 많이, 아주 많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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