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일찍 떴고 잠은 안 오고. 보고싶은 건 해리포터뿐인데 이삿짐에 넣어둔 책들을 찾을 길이 없다. 급한대로 6권 원서를 펼치고 유니버셜에서 사온 지팡이, 시간을 돌리는 시계를 곁에 뒀다. 유튜브 모닥불, 바닷가, 도서관 소리 등을 들으니 그런대로 아늑하다. 혼자 있을 시간이 너무 없는 탓인가 또 충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퇴근 후 기절하듯 잠든 탓인지도 모르겠고.
아늑해지니 배가 고팠다. 엄마가 불량식품이라고 싫어하는 스팸을 몰래 꺼냈다. 파동이 일어나 미디어서 멀리하라던 계란도. 추석이 지나니 그런 소란은 옛일이 되었다. 북어국을 데웠다. 내가 좋아하는 율무가 소량 들어간 잡곡밥을 떴다. 흰밥보다 이 밥이 더 맛있다. 소란스러운 것보다 있을 것만 있는 게 좋다. 좋아하는 것은 곁에 두고 커피를 타며 청승을 떠는 이 애매한 동트기 직전 아침이 좋다.
읽어야 할 책을 한 켠에 쌓아뒀다. 해리포터 상자를 꺼내면 또 쌓겠지. 해야할 일을 눈앞에 보이게 두는 게 좋다. 모닥불의 타닥거리는 소리 곁에서 불을 타닥 틀고 지지직 계란을 올린다. 그 위에 스팸을 얹으니 기름 소리가 훨씬 활기차진다. 듣기가 좋다. 이 시간을 누리려면 많은 게 필요한 셈이다. 아늑함을 줄 소리, 언제든 꺼낼 수 있어야 할 식량, 건강한 몸 등이다.
새 지저귀는 소리, 바닷물이 밀려오는 소리, 모닥불 이야기…. 눈을 감고 청각과 미각을 여니 환상이 따로 없다. 한가롭지 아니한 가운데 한가로운 여유를 잠시나마 상상하니 온몸에 전율이 돋는다. 인간의 본능에 모닥불 소리가 저장됐다는 모 문구를 떠올린다. 유전의 힘은 그렇게나 신기한 것이구나. 그렇다면 실생활과 보다 더 밀접한 과학 따위의 것을 다시 배워보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한다.
파도가 밀려오고 아침이 밝는 바닷가를 상상해낸다. 방해하는 이는 없다. 그곳엔 모래사장 위에 앉은 나뿐이다.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고 모래사장 위에 그대로 앉는다. 그러다 음악을 끈다. 파도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한다. 아픈 일들은 저 멀리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남의 일처럼 그냥 흰 바탕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아. 남의 일이다. 남의 일…. 그렇게 하자. 이제 더이상 내 일이 아닌 기억들인 것처럼 치부하자. 그래야 안 아프다. 따위의 것들을 생각하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냥 괜히 그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