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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Jan 08. 2018

'미씽:사라진 여자'와 절대적 모성성의 침몰

모성 신성화의 이득집단은 누구인가

※ 스포를 포함, 보는 이의 주의를 요합니다.



"엄마가 지켜줄게. 걱정하지마"

"한매, 내가 죽을게. 다은이 아무 잘못 없잖아"


한매가 죽었다.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리고 한국어학원에 보내지지('가지'가 아니다) 못한다. 바람들어 어디 가면 큰일난다는 논리다. 얻어맞는다. 아이를 빼앗긴다. 온갖 학대를 당해도 무덤덤한 인생에 내 배로 낳은 아이만은 지키고 싶었는데 거절 당한다.


"아이 죽으면 또 낳으면 돼"


누구의 사고인가. 아이를 또 낳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한매에게서 아기를 빼앗았는가. 아기는 한매의 희망이다. 지켜야 할 대상이다. 아기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내 안의 무엇도 빼내도 좋다. 몸을 이리저리 바쳐서라도 지켜내야만 했던 대상이다. 아이가 죽었다. 한매도 죽었다.


"갑자기 날 찾아왔더라고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박 씨를 찾아간 한매는 다르다. 별 집착 없던 삶에 아기라는 기폭제가 복수를 꿈꾸게 했다. 한매의 기폭제는 모성인가. 한매는 아기에 집착하고 이윽도 아이가 죽지 않았다고 우긴다. 알면서도 다른 아기를 찾는다. 한매의 모성에는 목표가 없다. 대체제가 필요했고 그걸 옮겼다.


"그 아줌마 이상해요"


한매는 다른 아기를 향한 복수를 꿈꾼다. 다은은 자신의 딸 대체제이므로 제외된다. 좌절된 모성은 의지할 곳이 없었다. 남의 유모차를 밀고 남의 아기도 다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다른 얼굴을 한 그는 마침내 자신을 학대한 가부장까지 무참히 살해한다. 불에 태운다. 시체조차 없는 가부장, 계급마저 바닥이던 그는 이제 세상에 남긴 게 없다.


"여자를 잘못 들여 내 아들이"


이 발언의 주체는 두 여자다. 아들을 둔 두 여자다. 낮은 계급 한 여자는 아들을 잃었다. 계급이라도 가진 한 여자는 손녀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두 여자의 분노의 대상은 '내 자식을 빼앗아간 다른 여자'다. 두 모성은 곧 사라없어질 노년이다. 두 모성은 자기 씨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분노를 다른 곳엔 마땅히 풀어낼 곳이 없다.


지선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외국인등록증을 확인할 새 없다. 밖에선 슈퍼을, 집에선 슈퍼죄인이다. 몸이 부서져라 달렸지만 얻은 건 원망과 정신병 의심뿐이다. 돈을 주고 고용한 변호인도 그의 예민함을 지적하며 하지 않은 범죄를 인정하라 종용한다. 그는 누구의 고용인인가. 신(新)모성이 시험당할 일은 구(舊)모성과 마찬가지다.

두 모성의 차이는 계급에서 한 번 더 갈린다. 구(舊)모성은 가부장에 기댄 기득권을 가졌던 새 모성에게 깃털 차이듯 버려진다. 그의 모성은 보잘 것 없는 것이 된다. 아이는 죽었고 분노는 가부장에게 향한다. 한매가 두 노년 모성과 다른 점은 그것이다. 분노를 쏟아낼 곳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한매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계급과 가부장에 밀렸던 그의 마지막 선택은 결국 스스로의 침몰이다.


노년 모성에서 한매로, 다음은 지선으로 나아가는 모성의 흐름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그들만의 분투로 끝내야 하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진 않더라도 지선을 도울 마지막같은 시스템만 처음부터 존재했다면, 한매에게 침대를 뺏기지 않을 그 '권한'이라는 게 있었다면 모성이 충돌할 일은 없었다. 절대적 모성에 기대 뭐든 억지로 쥐어짜내듯 진행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네가 그러고도 엄마냐"


모성 신성화는 누가 한 일인가. 모성 신성시를 통해 누가 얻는가. 과연 가부장이라고만 할 수 있는 것인가. 한쪽에 책임을 몰아두면 미래는 누가 여는가. 엄마라는 이름에 지운 수많은 짐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만능처럼 모든 죄책감을 한쪽에 쏟아붓는 그 단어는 누가 만든 것인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보상을 왜 다른 희생자에게 찾는가. 희생이라는 건 알아차리고 있는 것인가.


"다은이는 네가 엄마인 건 아냐?"


당신이 아빠인 건 과연 알까. 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다. 아빠가 있었으나 없이 자란 거나 마찬가지인 아이들은 당신의 갑작스런 친목 유도에 당황한다. 이 또한 가부장의 희생이다. 함께 낳았고 함께 길렀으나(물질적 지원도 양육이니) 당신이란 그들의 정서적 유대에 철저히 배제된다. 갈 곳 없는 가부장의 원망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모두가 얻을 게 없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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