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lph my man. my man man."
바넬로피가 랄프에게 손 내미는 장면, 이후의 전개부터가 이 영화의 압권이다. 랄프가 30년간 성실히 근무했음에도 불구, 캐릭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 인정 따위는 커녕 따돌림 받는 설정과 더불어서 말이다. 요새 말로 정말 '띵작'. 최근 집에서 여유 있을 때마다 마치 배경음악처럼 틀어두고 본 영화. 소리만 듣기도 하고, 바넬로피 대사를 반복해 듣기도 한다. 그것만으로 대단한 치유가 된다.
악당 랄프? 그런 건 없다. 자기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동료들에게 먼저 손도 내밀어 보고 모임에 나가 고민도 토로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나중에야 깨달을 진리. 그러나 그 진리, 주변 동료들이 먼저 배워야 랄프도 수긍할 수 있는 것. 배척당하면서 악당 롤끼리 손잡고 외치던 건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주변과 함께 성장하고, 밖이 아닌 자신 안에 있는 게 진짜 자기임을 깨달은 후에야 랄프는 당당히 외칠 수 있었다. 난 배드가이지만 그렇다고 진짜 배드가이는 아냐.
영화는 자막이든 번역이든 뭘 통해서 보는 것보다 그냥 그대로 보고 듣는 걸 추천한다. 캔디니스, 팝피니스, 듀티, 두티, hit a guy with glasses(얘는 이대로 봐야 해서) 등 말장난이 일품이다. 오레오 노래를 쓸데없이 비장하게 해대는 병사들도 웃기고 self거리는 랄프와 아기 아닐까봐 바로 self거리는 바넬로피의 대사도. 게다가 바넬로피 하는 말을 들어보니 처음부터 랄프가 누구인지 알았던 게 분명하다. 30년간 게임 세계서 일했던 랄프지만, 슈가팝 세상 말고는 갈 수 없단 바넬로피까지 아는 걸 보니 뭐 스크린 밖으로 봤거나(이건 레이서로 활동할 수 없었기에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바넬로피라면 뭐 그까짓 거 한 번 보고 오는 거 따위였을 수도 있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슈가팝 세상에선 이미 캔디킹이 단번에 봤듯(그는 터보고, 다른 세상에 오갈 수 있고, 게다가 왕이었으니 다를 거다) 유명한 배드가이였을지도.
그러나 바넬로피는 그걸 알고도 그에게 별 편견 혹은 남일이니 그냥 혹은 뭐 자기도 레이스 참여하려 하니. 어린이만의 순수함. 뭐 기타 등등으로 가서 다시 메달을 따라고 쉽게 말하는둥(그러나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통통한 볼으로 온갖 악동스러운 말을 해댄다. 캔디나무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랄프를 알고 있던 것 같으니, 그 이후 바넬로피의 행동들이 더 납득되기도. 주먹이 그렇게 센 줄은 몰랐겠지만, 적어도 랄프와 달리 바넬로피가 랄프에게 느낀 첫 느낌은 동질감 따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기적인 사람은 어딜 가든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도, 결국 들여다 보면 랄프는 이기심이 아닌 사랑받고 싶다,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에 메달을 따려 했던 거라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 깜박대며 움직임이 불안정한 2D 애니메이션 특유의 특징을 가진 그 동료들은, 랄프를 무턱대고 배척했으니 그럴 만도.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집을 부수고, 악역만 군말없이 30년 해내고, 파티에 찾아와선(선의였으나) 여기저기 부순 랄프니까 또 배척의 또 다른 명분을 얻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나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야기의 내막을 들은 나나 당신이라면 랄프에 서게 된다는 것. 그 얄밉게 보이던 바넬로피의 사연도 들어보고 나니 이해가 되는데, 사실 슈가팝 세상에 바넬로피가 정규 멤버였다는 건 극 초반에서 알 수 있다. 몸이 들어올려지면 달콤한 슈가팝 게임기가 보였지만 랄프는 두더지 게임 옆 레이서 게임 정도로 따분히 여겼으니 바넬로피와 특별한 인연을 만들기 전까진 몰랐을 법도.
원어로 들어야 맛이 사는 건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진짜' 카트를 갖기 전후 바넬로피를 그래도 한 번 더 느낄 수 있기 때문. 펠로우 레이서(바넬로피의 표현에 따르면)들이 카트를 부술 땐 엔진(이라고 바넬로피가 차의 어떤 부분) 상하는 데 경악했고 랄프를 회유해(?) 진짜 카트를 얻고 나선 '리얼 엔진'이 있는 데 환호한다. 부릉거리는 엔진 소리는 바넬로피의 '레이서 DNA'를 자극하는 듯하다. 매력적인 꼬마 레이서 바넬로피가 사실은 여왕이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를 계속 방해하기 위해 코드에 장난친 킹캔디는 어딜 가나 있는 적폐. 사람을 속이기 쉬운 그럴 듯한 논리의 얘기를 방패로 삼는 것도 그렇고. 이와 별개로, 인기가 떨어져 코드가 뽑힐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어야 하는 걸까 누가 묻는다면 글쎄. 그러나 바넬로피라는 희생양을 만들었다는 데선 뭐 두둔할 여지가 없다. 또, 인기가 떨어졌을 뿐이지 코드가 뽑히진 않았다. 더더욱 변명의 여지가 없다.
왜 이 작품을 이제야 봤을까. 제목을 어떻게 지었어야 좀 더 널리 알려졌을까 따위의 생각을 해본다. 주먹왕 랄프. 이것만 들어서는 영 맛이 안 산다. 영어 제목도 마찬가지다. 아니 차라리, 부숴 랄프 따위의 것이면 나았으려나. 영어 제목 있는 그대로. 어쩌면 랄프가 자기와 주변의 편견을 깨부수는 얘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넬로피는 그를 통해 진짜 자기를 찾았고. 혹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덩치 크고 잘생기지 않은 주인공만 전면에 섰던 게 문제일까. 차라리 바넬로피 공주였다면 나았으려나. 프린세스 바넬로피 따위의 것 말이다. 그냥 바넬로피였거나. 이런 저런 생각거리를 주는 영화. 흥미롭고 또 흥미롭다. 봐도 봐도, 파도 파도 계속 보게 되는 건, 정말 내겐 '띵작'이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