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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Jun 08. 2018

상실을 가늠할 수 있을까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영화의 더딘 진행 때문은 아니었다. 보는 데 어쩐지 조금 어려웠던 건 말이다. 아마 스튜어트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보는 데 꽤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끝에 다가갈 수록 많은 걸 내려놓는(혹은 내려놓게 되는) 엔더스의 모습을 보며 보상받는다. 그의 내려놓음으로 보상받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구나 하는 것과 그것에 온몸과 짜증으로 대항하다가도 결국 시간의 흐름에 굴복하는 그것. 혹자는 굴복이 아니리라 여기겠고 또 누구는 성장이라 말할 지도 모른다. 망할 성장, 그런 거 아닌 것 같다. 포기로 읽히면 또 별로일까.

젊음을 간직한다는 건 특권이다. 늙은 후에 젊음으로 눈을 빛내면, 그걸 알아줄 사람이나 환경이 없으면 때로 그건 추해진다. 아! 저 분 참 멋지게 사는구나! 저 분처럼 늙을 테야!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왜저래 ㄷㄷ 하는 소리를 듣는 분이 있다. 그 차이는 그가 어딨느냐가 가른다고 생각한다. 엔더스는 너무나 멋진 여자지만, 예전의 영광. 예전에 그랬던 것들. 거기에 취한 건 아니지만,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잃어가면서. 구글링을 하고 하이킹을 하고 연기를 하고.. 그런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향한 그의 집착, 짜증, 구차함을 받아주던 바넨틴이 떠난 건 엔더스가 '지금 나'가 아닌 '옛날 나'가 누린 것에만 매몰돼 있었기 때문.

애써 변한 현실을 모른 체해보려 '지금 핫한 그들'의 세상에서 동떨어진 척. 검색해봐야 알고. 혹은 척이 아니라 정말 외면. 아니면 정말 관심이 없었거나. 그래보는 그는 아직 소녀다. 소녀란 말도 편견일까. 그냥 사람이다. 청춘을 간직한 사람. 열정을 품은 사람. 과거의 사랑을 복기하지만 때마다 말이 달라진다는 말에 또 상처받는 사람. 그 순간을 오롯이 함께 하지 않았기에 정달하는 순간이 달라질 수 있음을, 굳이 구차하게 하나하나 설명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스스로 늙음을 부정하며 영원히 젊은 역할로 기대되고 싶다. 또, 중년의 여인 헬레나를 증오하며 그가 되길 거부해 보기도 하고. 그가 더 아름답다, 충분하다 등의 바넨틴의 설득 따위 들리지 않고. 대사 연습을 돕는 바넨틴과 주고받는 대사들은 연기가 아닌 그 둘의 상황이었을 지도. 그러니까, 연기하다보니 느낀 건지 뭔지 바넨틴의 젊음을 자기도 모르게 부러워 하거나 미워하고 있을 지도. 그러다 바넨틴이 떠나고 홀로 산을 내려온 후 신경질적인 모습과 '그 열정'을 얼마 정도 내려놓은 후, 할리우드 사고뭉치 조앤에 이끌려 다니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 그 모습, 정말 '엔더스'일까? 아니면 시간에 속아 변한 엔더스일까? 혹은 환경이 만든 엔더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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