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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Jun 17. 2018

'어느 하녀의 일기' 가치, 억지로 짜내 보자면

그냥 그것 뿐이다. 하녀의 삶을 기록했다는 것. 그가 처한 환경이 엉망이었고 먹고 살기 위한 선택지는 적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선택지도 좁아졌다는 것. 아름다움이란 보물 탓인지 덕인지 창녀로 길을 틀 기회(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강제로 부여해 보는)를 잡았으나 그게 과연 해피엔딩일까. 절대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억지로 가치를 매겨보자면, 주인의 욕구에 굴하지 않고 저 스스로 남자를 골랐다는 것, 그 남자가 강압적이었지만 선택권을 주는 척이라도 했다는 것. 그게 셀레스틴이 가져본 유일한 자발적 선택이다. 또, 자신과 동년배의 젊은 주인에겐 마음껏 비웃어주며 그 집으로 가지 않겠다는 오만한 이유들을 댔다는 것. 그렇게 나오는 길엔 아름다움에 탐욕의 시선을 받은 후 고급 창녀로 일하라는 제안을 받았었다는 것. 그리고 가지 않았다는 것. 그게 셀레스틴이 가져본 유일한 선택의 순간들이었다.

오만하다는 것의 기준은 어디인가. 삶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진 않아서 누구나 다른 위치에서 태어난다. 출발선은 다르고, 가진 것에 따라 가는 위치도 달라진다. 다른 출발선 뒤에서 출발했다면, 앞질러 보고자 발톱 빠지도록 달려봐도 원하는 것에 도달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셀레스틴이 했던 선택들은 그가 있는 처지에선 그나마 최선이었다. 유일한 행복을 느꼈던 순간은 파멸의 직전이었으며 그 후엔 거리의 삶으로 내려앉았다. 잠깐이라도 행복해보고 싶었던 순간들은 배신의 순간으로 뒤덮여졌다. 인생이 무서운 기세, 이길 수 없는 기운으로 셀레스틴을 덮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오만한 비웃음이었다. 그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레아 세이두에 홀려 본 영화, 끝날 때까지 기대를 1도 충족시켜주지 않은 영화. 그러나 몇 일 뒤에야 셀레스틴의 인생 한계가 뚜렷이 보여 너무 안타까웠던 영화. 젊음과 혈기를 무기로 할 수 있던 게 그런 선택뿐이라 너무 안타까웠던 영화. 점점, 어릴 땐 '왜 그래' 하고 이해할 수 없어 발버둥치던 것들이, 이젠 '세상사 다 어쩔 수 없어. 누구나 사정은 있고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할 수밖에 없었을 최선일 거야' 따위로 귀결되는 순간이 많아진다. 

영화를 보며 레아 세이두 덕인 지 모르겠으나, 그만 봐야 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가 행복해지는 걸 보겠어 따위의 것이었다. 뭐든 있겠지 하는 것도 있었다. 그가 선택한 곳이 그가 가진 혈기를 태울 수 있는 바닷가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보려도 했다. 마지막 행복이자 비극의 기억이 그곳에 있기도 해서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 영화는 프랑스 영화다. 셀레스틴이 자기가 선택한 곳에선 꼭 행복해지길 바라지만 그럴 수 없을 거란 생각, 당할 배신이 더 많을 거란 생각에 착잡해진다. 그는 자기 선에서 할 수 있는 한 반항하겠지만, 세상엔 몰라도 될 일도 있더라. 그곳으로 향하는 마차를 막고만 싶어진다. 혹은 갔다가 얼른 돌아오길 바라도 본다. 생각할 수록, 그럴 일이 더 많을 것만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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