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랄까. 나는 싫은 사람에게 싫다고 말하지 못한다. 불편한 얘기를 하는 사람에게 그만 하라고 말하지 못한다. 왜인고 하니 그런 경향성이 높을 뿐. 원인은 대부분 선배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일상 다반사이기 때문. 나이 들고 보니 절친한 친구 만나기도 참 어렵다. 시간은 없고 어렵게 시간을 내면 상대가 없고 상대가 있으면 내가 없다. 그 와중에 만나니 서로를 옥죄는 단서가 된다. 이렇게나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 널 만났어. 그 대가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을 가볍고 편하게 만난다. 부담없지만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관계. 이들과 있을 땐 불편한 얘기가 없으니 대화는 핑퐁처럼 정말 편하고 즐겁게 흘러간다. 겪는 환경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잃는 게 많다. 어른에 대한 혐오, 아저씨에 대한 혐오, 극단적 여성에 대한 혐오. 또 있다. 10대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를 대량 잃는다. 특히 취업 후엔. 연차가 더해질수록. 상대가 취업을 못한 경우가 더 많아 더더욱. 상대를 기다리다가도 서서히 잊는다. 시간은 그렇게 무섭다.
돌아와서, 싫은 사람에게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나는 서서히 거리를 둔다. 대부분의 경우 이 상대는 빠르게 눈치채지 못한다. 내가 좋게 거리두기 때문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그래서. 나는 연락을 씹는다. 이모티콘을 지운다. 답장 속도가 느려진다. 대부분 직장에서 만난 나이 많은 선배들이다. 이들은 격없이 지낸다는 것의 의미를 오해한다. 둘이 어디 여행 가자고 말하는 아저씨가 되거나 나의 삶의 철학을 쥐고 흔들려는 아줌마가 된다. 그저 경청하며 웃으며 네네 하던 나는 없어진다.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줄 안다고. 사람의 심리란 그렇다. 이들이 나빠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의 차이일뿐. 장유유서,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본능 따위의 논리가 통하는 한국 사회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흡수한 어른들일뿐. 욕망의 재조정이 필요한데 그게 안 된 사람들일뿐. 그 회오리에 내가 나를 둘 필요는 없다.
마음이 슬프고 불편한 건 잃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일 것. 오래된 친구 사이에도 적당한 예의가 필요한데, 때로 어떤 선배들 혹은 일부 친구들은 점점 더 격의 없이 막말하는 게 친구라고 오해한다. 또는 상대의 성공을 축하하지 못하고 경계한다. 깎아내린다. 나는 그래서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누가 말해서 달라지고 할 게 아니다. 그저 '이 사람은 나와 달라졌구나. 혹은 이제 본색이 드러나는구나' 하고 조용히 멀리할 뿐. 그 때가 되면 그 사람과 보냈던 시간, 그와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후회되지만 이내 다행이라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으니. 거를 수 있으니. 그러나 마음 한 편이 너무나 아리다. 슬프고 씁쓸하며 찝찝하다. 이 역시 시간이 해결하는 과업일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나의 생존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래 체력이 떨어져서인지 예전보다 겁이 생겼다. 그러니까. 예전엔 하고 싶은 일정이 있으면 '그냥 해'였다면 지금은 '이걸 이날 하면 그 다음날 아프겠지. 그럼 그 다음날 또 뭘 해야하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는 거다. 타버린 거다. 회복하는 게 어쩌면 타버린 것보다 더 어려운 일 같다. 통제, 걱정, 최선. 나를 옭아매는 것들을 조금 내려놓고 그토록 좋아하는 마음의 소리를 좀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어나버려 슬픈 일들로부터 멀어지자. 다행히도 나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시간이 다 지워주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