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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Dec 23. 2018

'취재원을 대하는 기자의 태도' 글에 앞서

견습 생활을 했던 곳, 이전 직장이었던 곳. 이들은 경제 매체다. 경제 매체에 계신 분들은 나이스하지만, 사상은 나와 너무나 다르다. 그러니까. 조중동한경오 를 말할 때 이 안의 기자들이 대개 '뼛속까지 자기네 회사 논조와 같은 사람'일 거라 여러분이 예상한다면 내가 아는 한은(다 알지는 못하니) 그렇지 않다. 언시판이 워낙 들어가는 문이 좁으니(이름 없는 인터넷 매체 등은 제외-물론 훌륭한 인터넷 매체도 있지만 그저 '대체적으로'의 의미에서) 열심히 기본권을 위해 싸우던 사람도 조중동에 들어가고 기본권 따위 관심 없던 사람도 한경오에 들어간다. 언시판엔 그래서 2호선 속설이 있는데 일단 지하철에 타고 내리는 문은 타이밍이라는 것. 문이 열리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는 것. 뭐 그런 러프한 비유다. 워낙 공채가 안 뜨니까 생긴 비유.


돌아와서, 경제 매체에 있는 분들은 대개 세련되고 나이스하다. 잘은 모르지만 생각해보자면, 물론 일부 매체의 경우에 따라 혹은 개인에 따라 패배의식 같은 걸 갖고 있는 분들도 있지만(더 큰 매체로 가고 싶다는, 나아가 종합지로 가겠다는) 대개는 타사에 비해 평균적으로는 좋다고 할 수 있는 처우에서 오는 여유가 아닐까 혼자 그냥 생각한다. 혹은 여기저기 언론판을 떠돌다가 그야말로 '나이스하게' 경제 매체로 입성하는 경우도 많아서 이미 둥글어진 상태라 그런 건 아닐까도 추측한다. 뭐.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느낀 선배들은 그랬다는 거다. 어디나 이상한 사람은 있고 곪은 부분이 있지만 그저 러프하게 내가 느낀 퍼센트로만 볼 때는 그렇다. 경제 매체에 있는 분들은 나이스하다. 선물 받는 것에도 죄책감이 없고 알려져도 괜찮은 문화라서. 기사로 딜하는 게 괜찮은 분들이라서. 그러니까, 그런 문화에 있으면 사람이 무뎌져 나이스해진다. 뭔 소리인지는 하단에서 다시.


그러나 이 분들이 나이스하지 않아지는 분야는 기본권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다. 그냥 제일 쉽게, 최저임금을 대하는 이들의 논조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종합지의 경향성과 다른 것은 이 분들의 생각이 회사 논조와 같을 때가 많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 매체들에 있을 땐, 사람들도 좋고 너무 행복했던 기억도 많지만, 일하면서 신나지는 않았다. 급기야 하기 싫은 기사를 쓰게 되고 해야 하는 기사를 쓰지 못하게 하면 마음이 슬펐다. 그 와중 막내라서 칭찬은 들어야 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고 평가도 정말 좋았지만, 그래서 빠른 승진(?)을 하는 바람에 문제도 생겼지만 어쨌든 좋았다. 뭐. 기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원초적인 것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하지만 나란 사람은 생각보다 참 완고해서, 내 스스로 설득되지 않으면, 명분이 없다면 그 일을 '그냥' 하지는 못한다. 한 번 조직논리에 순응하면 소처럼 일만 하는데, 그 '순응'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경제매체에 있을 때는 '커리어'에 그 '순응'의 이유를 뒀다. 그렇다고 내 기준 '써선 안 될 기사'를 쓰진 않았다. 개길 수 있는 한 개겼다. 버텼다. 모르는체 다른 발제를 해댔다. 이미 '일 잘 하는 애' 낙인효과가 있어서 '일욕심' '기자로서의 정의'로 이런 면도 그런대로 커버됐다. 뭐. 이건 그런 대로 잘 흘렀다. 뭐.. 술자리 등에서 일부 인간들 때문에 갖가지 사고에 몸과 마음에 병도 생겼지만 이건 하단의 매체에서 더 심해진 거니까.


지금껏 일한 회사 중 가장 논조가 잘 맞았던 곳은 그 마초 조직. 내가 그 조직을 혐오하는 이유와 통하기도 한다. 입정의를 외치는 그 매체에서 나는 단연 부장들의 예쁨을 받았다. 일하는 걸 너무 좋아했고 국장이 칭찬하면 신나서 일을 더 했고 일욕심이 많아서 뭐 그랬고 저랬고. 하지만 그 매체에서 공포가 자랐다. 이렇게나 뒤가 구린 사람들이 저렇게나 정의로운 얼굴을 하고는 피해자를 만나는구나. 피해자를 만난 후에는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기자상을 휩쓰는 구나. 공감하지 못한 채 기사를 써내고는 상을 신청해 타고는 페이스북에 정의감에 넘치는 사람처럼 말하는 구나. 그리고는 대중의 신뢰를 얻는구나. 그 과정이 혐오스러웠다. 그냥 좀 보기 그랬다는 거다. 술자리에서 여자 후배 불러다 놓고 허벅지 주무르고 노래 시키고 집에 못 가게 하고 별의 별 말을 다 하면서 그렇게 정의감에 넘쳐 남의 회사 성추행 성희롱 사건은 열심히 대서특필해대는 구나. 그런 공포가 자랐다.


'취재원을 대하는 기자의 태도'에 앞서 이런 내용을 구구절절 적은 건, 취재원이 기자를 대하는 태도가 대개 '그 매체'의 이름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자 개인의 도덕성이나 기자 개인보다 그 이름을 보고는 '저 인간은 저기서 일하는 쓰레기', '저 인간은 저기서 일하는 성자' 따위로 극단적으로는 나뉘기 때문에 나는 이직 후 별의별 소리를 들었다. 저 위 진보매체에선 인터뷰가 어려운 적이 손에 꼽는다. 대개 '없다'로 치면 될 것. 그러나 최근 이직한 우리 회사는(개인적으로 이제껏 거쳐온 회사 중 비교적 가장 민주적이다 물론 모순적이지만 그건 모든 회사가 그럴 테니) 명함을 내밀면 '여긴 줄 알았으면 인터뷰 안 했어요' '인터뷰 한 내용 기사 가기 전에 제가 검토 좀 할 수 있을까요' 등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듣지 않았던 얘기들을 듣게 한다. 너무나 당당하게 자기가 기사를 데스킹하겠다는 그 마음에 대해 황당하고 놀랍지만 몰라서 그러겠지 하고는 정중하게 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때마다 자괴감이 생긴다. 미묘하게. 쌓였던 것들이 이제 흘러서 그런가. 이 회사 와서 들었던 그 말들이 최근에는 점점 듣기 싫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연 없는 무덤 없다고. 그 사람들이 저 위의 사정 또는 회사들의 내부 사정을 알 턱이 있나. 그러니 그렇지.


취재원 중에는 인터뷰에 응하고서도 이럴 거면 왜 인터뷰에 응했을까 싶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자는 감사한 마음 혹은 사회를 위해 이런 사람은 떠야 한다는 나름의 발제와 회의를 거쳐 그 당사자를 찾아가지만 놀랍게도 사람은 여러 면이 있어서, 당연히 보여지는 게 다가 아닌 사람이 있다. 물론 좋은 분도 많고. 후자는 제외하고, 전자의 경우 기자는 혼란에 빠진다. 이 사람을 사회에 알려도 되는 걸까? 내가 아는 것을 이 사람의 이름만 빌려 거짓말을 적게 되는 건 아닐까? 왜나하면. 대개의 경우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인터뷰이를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하고 그가 하는 행적을 따라 다닌다. 그러고나서도 의문이 들게 하는 인터뷰이는 기사를 최종 데스킹 받는 과정까지 마음이 찝찝하다. 그러나 그가 대단한 실수를 한 것도,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 그저 눈 꾹 감고 믿는다 하는 마음으로 넘기는 것. 매사에 강박적으로 느껴서는 병이 생길 테고 주변에서도 안 좋은 평을 들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혼란하다. 가짜뉴스를 만들고, 사람 하나를 띄우는 게 가능해진 이 세상(일부 온라인 매체 범람으로 혹은 일부 경제 매체의 장삿속으로 돈만 있으면 뉴스에 출연하는 것따위-공중파, 공신력 매체 제외- 별 게 아닌 세상이 되었으니)에서. 작은 기록들이 쌓여 그가 커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인데. 함부로 담아도 되는 걸까 하는 고민을 매순간 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모순적이라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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