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에서 '비포' 시리즈를 전부 릴리즈했다. '비포 미드나잇'만 둥둥 떠있곤 해서, 시리즈 초반 작품들을 보기 전엔 안 보고 싶어서 보지 않았더랬다. 그랬던 것이,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이 줄줄이 풀리면서 지난 주말과 크리스마스, 단숨에 꿀떡꿀떡 작품들을 봤다. 아파서 끊어 봐야 했지만 뭐 둘째 치고. 너무 좋아서 틀고 있는 내내 치유받는 기분이었달까. 남이사 무슨 말을 하든 말든 정의감에 불타올라 때론 예민하다, 우울증이 있다는 등의 오해 혹은 팩폭까지 듣는 셀린, 공상에 찌든 소리만 해대며 자기만 옳아 시끌시끌 떠들던 제시. 시간이 흐르면서 둘의 캐릭터는 반대가 되기도 하고, 둘의 생각은 변하기도 한다. 신의 무용함에 대해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떠들던 제시는 늙어선 교회를 찾아 가보기도 하고, 그래도 조심스레 신을 대했던 셀린은 귀여운 장난도 서슴지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가 뭐라 떠들든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가끔 보면, 중년 부부 중에는 대화의 흐름이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도 신기하게 대화의 형태를 띄는 경우가 있는데, 제시와 셀린은 영화이니 어쨌든 같은 얘기는 한다. 하지만 곧 다른 얘기다. 즉, 둘이 마주 앉아서 뭔가를 얘기하고는 있는데, 젊은 시절 사랑을 속삭일 때마저도 서로 다른 생각과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이건 좋게 말하면 네 생각이 뭐든 난 얘기해, 넌 그렇게 생각해? 난 이렇게 생각해 대화이고, 굳이 나쁘게 얘기하면 겉도는 대화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가 찰져보이는 건 서로를 좋아하기 때문에. 또, 영화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린, 제시의 대화가 참 탐났던 이유는 그 '넌 이렇게 생각해? 난 이렇게 생각해' '아 넌 그래? 난 이래' '이건 답이 없고 재미없으니 다른 대화 하자'가 있었기 때문. 이런 대화가 미치게 그립다. 대개 친해질수록 선을 넘고 '네 생각은 틀려' 따위로, 혹은 안 친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너를 교정하겠어' 따위의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은 다 다르고, 누구나 겪어온 게 다르기 때문에, 내가 완벽한 너가 아닌 이상, 혹은 네가 완벽한 내가 아닌 이상, 느끼고 말하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다 다를 수밖에.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완벽한 하나가 되는 것은 판타지니까. 커플뿐 아니라 친구, 그냥 만난 사람 등 모두 해당하는 얘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의 마음은 달라지고, 처음의 기억으로 평생을 갉아먹으며 살다가도, 처음의 스스로를 질투 혹은 그리워하고. 변해가는 모습에 슬퍼하고. 이건 상대에 대한 의심이 깔려 있기 때문. '그 여자와 잤냐'는 셀린의 물음에 '내가 가족에 충실하지 않았느냐'고 답하는 제시, '전처와 낳은 아들 때문에 온 가족이 생활환경을 바꿀 순 없다'는 셀린의 말에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걸 다 버렸다'고 말하는 제시, 상황을 무마해보려 온갖 달콤한 말을 하는 제시와 현실을 덮어둘 순 없는 셀린. 여자와 남자는 이렇게나 다른 것인가? 혹은 인간과 인간은 이렇게나 다른 것인가. 다르다. 달라서 어쩔 수 없는 대화다. 둘은 평생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거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덮어두고 달콤한 대화로 돌아가보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 모든 다툼의 형상이 다 삶이기 때문이다. 동화책은 현실이 아니라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없다.
처음 만남에서 제시의 무모한 말들, 허세 섞인 말들을 듣는 셀린, 사회를 정의롭게 바꾸리라 생각하는 셀린의 말을 듣고 그러려니 하다가도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말하고 또 그만하자는 말에 금방 넘어가는 제시. 귀여운 이 젊은 둘은, 그 때만 가능한 대화를 했던 셈이다. 그저 대화로만 '이렇게 넌 다르고 난 이렇고'를 알고선 서로를 계속 참아줬던 건, 서로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지도. 그러니,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냥 그런가보다 할 수 있었겠지. 대화로 온 시간과 장소를 물들일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 힘든 일일 거다. 호감이 바탕이 돼야 가능할 테니까. 제시와 셀린이 10년이 지나도 서로를 그리워했던 건, 이 순간이 그들에게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이해의 장 따위의 것이었을 테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러려니 하는 사람. 하지만 바보는 아니고, 그냥 그러니 해주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어디 있겠어. 판단당하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 어디에 그리 흔하게 있느냔 말이다. '비포' 시리즈를 정주행하는 것만으로도 치유되고, 다시 인간에 대한 희망이 생긴다. 첫 작품이 나온 시기를 보고 또 놀라고. 명작은 괜히 명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