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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Jan 05. 2019

'여유' 있는 투쟁들의 필요성

새해가 밝고 벌써 주말이다. 하루종일 일했는데 뇌를 더 가동해서 그런가 당일치기 출장 여파인가 잠을 잘 생각이 안 든다. 모르지. 커버 주간이라 그럴지도. 어쨌든 몸은 알아서 긴장상태도 만들고 비상상황도 만든다. 그래서 어쩌려나 싶어서 그냥 그대로 있는 중이다. 지쳐 잠들겠지 싶어서. 새해가 밝아도 일상은 같고 시간도 여전히 빠르게 흐른다. 올해도 눈 감았다 뜨면 3월이고 여름이고 할 것 같지만 말을 넣어둔다. 일단은 1월이니 기분이라도 누리자. 설 주간까지는 새해인 척을 마음것 할 수 있으니까. 이후 쏜살같이 흘러갈 시간을 마주하기 전의, 잠시 멈춘 시간 같은 거랄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부모가 준 유산은 사람마다 다르다. 차은우만큼 잘생긴 외모로 시작부터 삶이 달랐던 사람도 있고 부모가 어렸을 때부터 커리어를 관리하는 사람도 있다. 지역에 살아도 부모가 욕심내 서울까지 데려가 이것저것 시키는 가정이 있고, 그런 거 모르겠고 학교 다니는 걸로만 충분한 부모도 있다. 어린 시절엔 잘 모르지만, 많은 건 부모 손에 결국 결정된다. 많은 걸 가진 사람은 가진 채로, 없는 사람은 혼자 깨달아 괴로워하며 발악하거나 혹은 영원히 모르고 가지지 못한 채로 산다. 그 안에서 그걸 태어날 때부터 겪은 사람은 잘 모른다. 그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그건 운에 불과하다는 걸 다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힘듦'을 말한다. 힘듦에 등수를 매기자는 건 아니지만, 다들 '힘들다' 하는 삶에서, 소득분위를 보면 그보다 '더~ 아래'에 존재하는 어떤 등급이 있다는 걸 보면, 그저 조용히 침묵하는 걸 추천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다들 '힘들다'고 외치지만 정말 나쁘게 말하면 '여유'가 준 선물일 뿐. 우리가 투쟁하는 일부 이야기는, 물론 당연히 필요한 얘기지만, 어쨌든 어떤 형태의 여유가 준 선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여유 덕분에 점점 사람들이 주장하는 여러 바람직한 가치들이 당연하게 되리라는 걸 안다. '가진 거 많으니 감사하며 살라는' 개똥꼰대철학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래서 '누리는' 사람들이 나서 말해야 할 이유가 많다는 걸 주저리 떠들고 싶어서 그런다.


재작년인듯 재작년 같지 않은 재작년인 2017년 3월 일기장에 '스칼렛 요한슨 등 입지를 굳힌 배우가 나서서 자기가 얼마나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말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적은 적 있다. 당시 그나 다른 셀럽들이 인터뷰에서 한 말을 보고 적은 거였다. 그 외 이곳 저곳에서 나서 행동하는 이들의 역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이들처럼 대중에게 친밀하고 어쨌든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대놓고 자기가 얼마나 불공정한 상황에서 커왔는지, 유리천장 따위를 언급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당장 먹고 살 걱정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유리천장 따위가 웬 말이냐', '혹은 정치 공작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무슨 상관이냐. 신경쓸 여지가 없다' 하는 이들도 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정말 신경쓸 여지가 1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여유' 있는 투쟁(?)]이란 엘리트들로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다. 입만 산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돈 많은 샌님들(앞서 언급한 인물과 연관 없음)에게 상을 주자는 게 아니라, 정말 그들이 나서 말하는 일이 '생각보다' 아주 중요하다는 거다. 이들이 나서서 말하면 칭찬까지는 아니더라도 돌은 던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그거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잃을 게 많다. 그게 아니더라도, 가진 게 많은 사람은 구태여 나설 필요가 없다. 다 가졌으니까.


그러니까  약자들에 대해 잘 모르면 조용히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약자에는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여러 사회적 의미의 소수자도 들어간다. '대놓고' 약자의 위치에 서보지 않은 이상 '나와 다른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누군가에겐 사치다. 공감을 깊이 잘 하는 사람이더라도 '그 상황'에 가보지 않고서야 '당사자'만큼 '상황과 맥락을 이해한' 판단을 내리는 건 어렵다. 경험치가 쌓여 '이런 상황이었겠구나' 싶은 추측을 하는 것은 몰라도 '그 약자'로 세상을 살아볼 순 없다. 그러니 잘 모르면 떠들지 말고, 특히나 약자인 누군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면. 혹은 그가 약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내려 한다면. 또는, 약자들의 연대가 꿈틀댄다면. 잘 모르면. 입을 다무는 것이 참 좋은 방법이다. 때론 그들이 하는 투쟁이 '지극히 편해서 나오는 투쟁' 혹은 '얼핏 볼 때 덜 중요해 보이는 속편한 소리' 같더라도, 세상은 크고 작은 투쟁들이 진보를 일궈낸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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