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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Mar 12. 2019

아닌 척 하면서 피해자를 찾는 그대에게

미친 자들의 미친 짓이 세상에 알려졌다. 자극적 단어로 시작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미친 짓이니 미친 짓이라 부르겠다. 아니, 미쳤다는 말도 아깝다. 단톡방이란 걸 만들어 그 안에서 범죄를 자랑하고 허세 부리고 자신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았던 인간 군상들에겐 그 어떤 말도 붙이기 아깝다. S든 J든 그들의 범죄 행위에 대해 아무도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들이 버젓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나오고 누가 봐도 이상한 삶을 영위하는데 누구도 막지 않았다. 방송가에서 그들의 사생활을 세세하게 알지 못했다는 것, 그건 거짓말이다. 제작진은 당장의 프로그램, 섭외를 위해 그들을 썼고 대중은 모르고 그들을 수용했다. 발탁한 소속사든 제작진이든 그들의 더러운 면을 하나도 몰랐다는 건, 그러니까, 살 붙이고 활동하는 매니저 등의 인물이 그들의 그런 행위를 몰랐다는 건, 어불성설. 리얼리티라는 이름을 달고 그들을 대중에 내보인 죄. 그건 크다. 아무나 발탁해 내보인 죄.


어쩌면 일부 대중은 이미 그들이 수차례 논란을 거친 걸 보고 알고 있었을 테다. 저들의 사생활은, 속칭 '더럽다'고 말하는 그것이겠구나. 그러나 인간이 어디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지 우리 즉 보통의 대중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까지 더러울 줄 몰랐겠지. 이제서야 밝힌 일들이 커넥션 따위의 일을 알리는 속칭 '작은 공'이 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이들의 죄가 묻히는 건 말도 안 된다. 마치 그 옛날 털보 아저씨가 '대의를 위해' 따위의 헛소리 지껄이던 것과 같다. 나아가, 더 나쁜 것은 이 범죄자들이 '누굴' 상대로 '감히' 범죄를 저질렀는지 '감히' 상상해 그것을 '기사'라는 숭고한 플랫폼에 옮겨 또 한 번 대중을 속이려고 하는 시도다.


인기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는 범죄자 이름이 아닌 범죄자 이름에 '동영상'이 붙었고, 그 첫 번째 기사는 피해자가 누구인지 특정하는 단서를 던진 '단독'이라는 한 데스크 혹은 한 기자 개인의 추악한 생각이 묻은 기사다. 그 기사를 쓰면서 데스크 혹은 기자는 자신들이 누군가를 특정하면서 지라시의 무고한 이들을 구제한다 생각했을지 모르나, 그들 역시 2차 가해의 논리에 들어갔을 뿐이다. 범죄자의 행동에 천인공노하는 듯 제목을 뽑았으나 그 역시 피해자를 특정한 내용일뿐. 그들은 왜 피해자의 직업을 밝혔는가. 이유는 뭔가. 그저 일부 대중의 구미를 당길 미끼였을 테다. 그들 자신이 본인들을 뭐라고 위안한들 그들이 그 기사를 쓴 건, 그들을 위해서다.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직업이 특정되는 걸 바랄까? 아니. 피해자는 단톡방에 자신이 있을까봐 떨고 있을까? 응. 범죄자가 남긴 기록에서 중요한 건 뭘까. 누가 당했는지? 물론 중요하다. 당신이 수사하고 있다면. 그러나 기자라면. 피해자가 누구인지 취재 과정에서 듣더라도 그걸 기사로 쓰는 게, 그게 맞는 일일까? 아니. 근데, 왜 썼을까? 데스크에게 보고했더니 데스크가 얼른 쓰라고 해서? 혹은 본인이 써도 된다고 생각해서? 감히 당신들이 그걸 왜 결정하는가? 시민의식은 날로 성장하는데 당신들의 수준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분별력은 버렸는가? 기사 작성 교육은 안 받았는가? 피해자를 기사에서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세미나라도 가서 한 번 들어라. 제발 부탁이다 이 기레기들아. 보호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감히 다른 삶의 상처를 마음대로 '들춰도 된다'고 판단하지 말란 말이다. 어떤 사안은 어디까지 캐도 되고, 어떤 건 안 된다는 걸 분별 못하는 그 정도 수준이라면 '기자' 이름 반납해라.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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