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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Jan 09. 2020

즐거운 인생

하고 싶은 걸 할 여지가 있고 푹 쉴 마음이 있다. 최소한의 여유를 점차 확보하고 있다. 물리적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취향을 반영할 시간이 생긴다는 건 축복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시간을 심심치 않게 가진 이는 그 축복을 알기 어렵다.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니 나는 그런 생각으로 나의 지난 10대 이후의 시간들을 보냈더랬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건들에 대해서, 나는 그냥 훗날을 위한 거름 따위로 쓰일 것이라고 무언의 확신을 하며 살아 왔다. 그러니 나는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 없는 나의 상태를 그저 행복하게 받아들였다. 인간은 다 혼자며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만 해결할 수 있는데, 그것을 일찍이 깨우쳤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 부침을 어려서부터 견뎌 왔다는 것, 마침내 익숙해지고 당연시했다는 것은, 때론 억압이었으나, 늘 되새겼던 것은, 그 시간들이 반드시 내 거름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혹자는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지만, 눈치 빠른 어떤 이는 그깟 고기, 안 먹어봐도 먹어본 체 하고 쉽게 공기를 읽어 배워 낸다. 그것은 대개 환경이 마련하는 후천적인 축복일 수도 있으나, 대개는 천성이라 여기는 것. 나는 둘 다 믿는 인간. 내가 남자가 아니라 다행히 아버지에게 폭력적 성향을 이어 받지 않았으며 지극히 도덕적 잣대를 엄격히 여기는 어머니, 그러나 자신과 가족의 얻어 터짐은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어떠한 부자연스러운 격정적 책임감을 보고 자라며, 혼자서 살 법을 반드시 익혀야 세상서 내 뜻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워낸 나의 어떠한 환경. 그것들을 적당히 다듬어 익힌 나란 존재에 대해, 힘들 때마다, 나쁜 일을 미리 겪은 것들이 반드시 쓰임새가 있으리라고 나는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살아왔더랬다.


인생은 배반의 연속이라, 그렇게 사랑받지 못했던 경험 혹은 억압됐던 경험들은, 당연히 사랑을 충만히 받거나 비교적 보호자에게 의지할 수 있던 환경 따위에 있던 이들에 비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형태였을 거라고, 한 걸음 떨어져서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지난 시간으로 결코 돌아가고 고 싶지 않다고, 그리 생각하며 매일을 살아왔던 것. 최근 들어 내게는 일련의 취향을 반영한 구매, 문화생활 누리기 따위의 사치를 종종 부릴 여유가 생겼다. 그러니 나는 인생이 나아질 일밖에는 없다고, 상대적으로, 그리 믿고 있으니, 매일이 기대되고 앞으로를 살아가는 힘 역시 부단히 기어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대개 일기장에 와 징징대는 순간들은, 웃긴 말로, 날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랄까. 뭐 그런 시간의 일종 따위다.


뭐 하나에 푹 빠질까봐 눈길도 안 주고, 좋아할 법하면 당연히 선을 그었던 과거의 내 습성은, 여전히 남아 어떠한 습관이 돼 머물지만, 나는 그래도 점차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하나씩 알아가며 내 다른 소리에도 적응해 가는 인간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20대 초반에 진작 했어야 할 일들에 대해, 나는 미뤄온 과업들을 하나씩 수행을 할지 말지 생각하며, 그래도 행복한 고민에 미소지을 수 있는 어떠한 인간의 한 형태가 됐다는 것에 대해, 매일 이른 아침 미소 지으며 자축해 보는 것이다. 나아질 일밖에 없으니, 다시 두려워 하지 말고 나아가라. 이제는 내 얘기를 주절거리면서, 그렇게 과거의 일처럼 여기게 된 사건들은, 이제 뒤로 하고,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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