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어리진 날들이여 잠시만 안녕

by 팔로 쓰는 앎Arm

"내 걸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돼요."


강단있어 좋아하는 가수 하나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가수가 직접 말하는 방송 등을 보진 못했으니 '알려져 있다'고 갈무리했다. 저 말이 기억에 유독 남았다. 흘려들은 말인데 그렇다. 나는 가혹하게 스스로를 담금질하는데 익숙했다. 속칭 K장녀들이 그렇듯 엄격했고 기준도 높았다. 지금도 그렇다. 그 점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게 날 키웠으니까. 다만 인정해주지 못하는 점도 컸다. 나는 노력중독이었다. 빠른 시간 안에 적응하고 좋은 성과를 내고는 좋은 자리를 잡고 공허해서 견디기 힘들어 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이제 좀 편해졌으면 적응하면 되는데, 야생으로 돌아가 긴장을 느끼고 싶어 이 난리였다. 젊음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계획에 결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내 감이 살아있을 때 뭐든 더 커리어에 넣어야 했다. 나는 그런 욕심에 시달리며 일을 추진했다. 슬픈 일도 아니고 안타까운 일도 아니다. 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인데 어쩐지 공허는 더 커져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적당히 평온해져서는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해야 한다는 마음의 외침에 더 쉽게 흔들리고 있었다. 도약해야 한다.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 그 다음은 또 다음 단계로, 다음은 또 위로….


그러다 보면 끝은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정답은 나도 안다. 없을 거다. 난 그게 욕심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애매한 재능은 슬프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그걸 버틸 굳은살을 가졌으니 그게 아깝지 않게 얼른 더 힘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언제든지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뒷감당도 내가 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나를 어디든 끼워 맞추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쉽게 적응했고 쉽게 해냈다. 정신력의 승리랄까. 해야 겠다 싶으면 그냥 해냈다. 그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근데 따라온 또 다른 수순은 고통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축적되던 정신적 고통이었다. 나는 매순간 나를 끼워 맞추려 나를 죽여 왔는데, 그 껍데기가 하나둘 수년을 쌓이더니 이젠 나를 집어삼킬 만큼 커져 있었다. 나는 커져버린 껍데기를 가슴에 뜨겁게 품고는 이 응어리를 잘 풀어야지 하고는 다시 일을 했다. 다른 결과물, 더 좋은 것이면 응어리도 더 잘 풀어질 거야. 하지만 응어리는 더 견고해졌다. 풀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커지면 커질뿐이었다.


다만 더 이상 악몽은 꾸지 않았다. 공황은 이따금씩 찾아오지만 과거에 비하면 나아진게 분명했다. 나는 가슴 속 응어리를 키우는 대신 다른 고통을 없앨 수 있었다. 마음 한 편에선 이게 옳은가에 대한 질문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하루 하루 더 연장해 보려고 무진장 노력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르지 않는다. 안다. 그러니 이 가슴 속 뜨거운 응어리를 진정으로 뿜어내 보려고, 나는 또 한 번 알을 깨고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알을 깰 수 있는 의지와 정신력이 있을 때, 나는 자꾸만 알을 깨고는 최선의 알을 갖고 싶다. 알을 깨면 없어야 하겠지만 자기 세계가 사라지는 걸 말하는 게 아닐 테니 다른 알은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 지금 깨야 하는 알은, 역설적이게도 내 정신을 방치하며 다른 걸 우선에 두던 일이 되었다. 거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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