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는 말이 권력이 되면
일을 하면서 아프다는 말은 잘 안 한다. 나도 그렇고 보통 선배들도 그렇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냥 참는다. 그래도 티가 나니 숨기려 한다. 그건 다 힘든 걸 알아서고 약점을 굳이 드러낼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상태니 유의해 주세요 하는 발화 형식의 아픔 공유와 나 아프니 건드리지 말라는 발화의 형식은 굉장히 결이 다르다. 후자에 속할 경우 주위 사람을 향한 가스라이팅이 될 수 있으며 이 경우 반발을 부를 수 있다. 내 경우에는 그냥 전자나 후자나 아파서 예민할 테니 넘겨 주자는 주의지만 가끔 이런 데 꽂혀서 이상하게 당사자를 괴롭히는 선배도 있다. 게다가 아프다는 사람에게 약을 건네주면 이런 걸 왜 들고 다니냐, 건강의심장이냐는둥 고맙다는 말 대신 스스로의 괜한 민망함에 이상한 말들을 해대니 그냥 관여 안 한다. 이러니 저러니 아프면 자기만 손해니 티 안 내는 게 좋다는 게 어쨌든 내 생각이다. 나는 어디서도 티를 내며 약을 먹지 않는다. 숨어서 먹고 아프다는 사실은 숨긴다. 일기에나 주절거릴 일이지 공공연하게 자랑할 일도 아니고 알려져 봐야 손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적어도 내게는.
언젠가 후배 A가 밥을 사달라고 집 근처로 온 적이 있다. 선배들에게 밥을 얻어먹었듯 후배들에게 지갑 여는 게 으레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바 달려 나가서 밥을 먹는데, 후배 A의 지인 C도 동석했다. 후배 A는 그렇게 말도 없이 다른 사람을 부르는 일이 몇 번이고 있었는데 그냥 애 자체가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크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모아두는 걸 좋아하는 듯해 별 말은 안 했다. 다만 A의 문제는 이거였다. 그 자리에 본래 B도 부르려 했다면서, B는 요새 공황장애에 시달려서 밖에 못 나온다는 말을 꺼낸 거였다. B의 내밀한 이야기를, 그를 잘 모르는 나와 C의 앞에 B의 동의 없이 꺼낸다는 것. B가 이전 직장 선배의 고백으로 괴로워서 (정확히 말하자면 '너 정도 나이대면 내가 사귈 수도 있지 않냐'는 농담이었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르니 이 말에 불편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이 글에선 논외로 한다. 내 경우는 저런 말까지 의미를 두면 개인적으로 스트레스 받을 일이 너무 많으니 흘려 들으라고 생각하는 주의다. 물론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는 있다.)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말을 줄줄이 꺼내두는데, 그의 말로만 따르면 B가 조금 예민하게도 비쳐질 수 있는 상황이라 우리는 모르쇠하고 다른 말을 했다. 그래도 A는 분위기가 그러면 금세 입을 다문다. 그게 A의 장점이다.
문제는 또 벌어졌다. A는 주말 우리 집 근처로 또 놀러왔다. 카페에서 커피를 먹는데, B를 불렀더라. A는 늘 그렇게 상의없이 사람들을 부르곤 해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가끔 만나는 이라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많았다. 문제는 B가 앉자마자 자기가 요즘 공황장애라서 술을 못 먹는다고 선언한 것이다. 술을 마시러 가자는 이야기도 없었고 평범한 공부 이야기들을 하던 터였다. 지금 보니 B는 우선 자신이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부터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게 멋지다는 공상에 취해있던 것이다. 나는 A와 B가 왜 친한지 알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B가 줄줄이 늘어놓는 이야기에 부담스러워서 커피를 마시는둥 마는둥 했다. 나와 B는 친한 사이가 아니고, A를 통해 세 번 정도 본 게 다였으며 그조차도 단기간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공적인 일이 있을 때였다. 우리 사이엔 어떤 신뢰도 형성된 바 없으며 그걸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 내용조차 공감가지 않았는데, 설령 그 수준이 심각했더라도 나는 부담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첫째, 그는 내 인터뷰이로 나온 게 아니었고 둘째, 나와 인적교류가 없으며 셋째,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 혹은 그런 말을 하겠다고 언질을 준 상태도 아니었다. 그는 따발총 쏘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그런 걸 견디고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ㅇㅇㅇ해서 다니는 거냐는 등 그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 수준이 꽤나 무례하고 당황스러워 나는 공포심마저 들었다.
내가 이러이러해서 아프단 말의 발화는 신중해야 한다. 상황에 맞아야 하고 가급적 약점은 드러내지 않는 게 좋다. 내가 아무리 뭐든 품는다지만, 나 역시 이야기를 걸러 듣는다. 누구나 그렇다. 피해 사실을 전시하는 행위를 싫어한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말해왔고, 뭐든 신중해야 한다. 너무 말을 하지 않아도 바보가 되지만 불필요한 말, 특히 상황에 맞지 않는 발화, 분위기를 주도하려 자신의 피해를 전시하는 발화 행태는 실제 피해를 입은 사람이나 도움이 있어야 할 곳들에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 세상엔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고 여러 사람이 있으므로 아름답기도 하지만 복잡하고 어렵기도 하다. 늘 아름다운 면을 먼저 생각하며, 나는 늘 생각과 말을 삼키고, 사람을 거른다. 내 사람에게만 잘해도 부족한 시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