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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Mar 20. 2024

'패스트 라이브즈' '밤양갱'

그 누구보다 빨리 저 콘텐트들을 접했으면서 일기는 이제야 쓴다. 일기를 쓸 상태가 아니었다. 뭐, 그런 상태란 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적어도 내겐 그랬다. 일기를 매일 썼다면, 절망의 기록만 가득했을 것이다. 아니, 사랑의 기록도 있었겠지. 뻔한 일기들로 가득했을 테지. 


우연히 영화를 볼 일이 생겨서 보는 내내 나는 춥고 힘들었다. 쓸쓸함 때문인지 정말 시설이 추워서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추!웠!다!는 게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는 과장이고, 나는 이제 너무 지쳐서 꿈을 따르다 버린 것들에 대한 논의를 할 힘이 없다. 인연 같은 키워드를 넣어 그게 감동적이라 할 힘도 없다. 그냥 그게 인생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수많은 손을 뿌리치면서 제 꿈이란 걸 이루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나는, 그게 안티 히어로 같은 노래에 대중적으로 담길 수 있는 감정이라는 점과 라라랜드의 세계적 성공을 통해 보듯 누구나에게 통용되는 감정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특별한 체하면서 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오버가 아니라 정말 흔한 패턴이 되어버린 소재이기 때문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가 그렇게 자랐든 말든, 그런 사람들이 또 있기에 소비되는 패턴일 거다.


패스트 라이브즈.


달랐다.


뭐가 달랐느냐. 지나치게 솔직한 그 이야기들. 영주권을 위해 결혼한 것처럼 보이는(에이 설마) 그들의 애정표현은 내게,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커플의 내밀한 이야기를 억지로 들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어른의 세상, 현실이겠지. 그렇게나 멀리하고 싶었던, 혹은 안정되고 싶었던 모습의 일부겠지. 어린 태성과의 이별 장면은 아직도 어렵다. 태성의 눈빛이 어렵다. 남은 자의 마음은 짐작이 가지만, 떠나는 태성의 눈빛은 해석하기 어려웠다. 완전한 마침표를 찍기 위해 왔다는 걸 알아서, 그렇게 생각하기엔 마음이 처참해져서 어렵다고 에둘러 표현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떠올렸다.


그래서 밤양갱도 함께 묶인다.


밤양갱을 처음 듣자마자, 나는 그가 떠올랐다. 그도 떠올랐다. 그대들이 떠올랐다. 그대들이 내게 몇 번이고 했던 말 아니던가. 너는 바라는 게 너무 많아. 그건 슬프게도 우리 사이에선 내가 나한테 바라는 거였다는 게 노래 내용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태성의 상대처럼, 나는 다른 곳을 봤다. 아무 생각 없이 자신감에 차서는, 다른 곳만 봤다. 그건 누구에게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바라는 것. 그걸 위해선 뭐든 버렸다. 그리고 오늘, 나는 갈기갈기 찢긴 마음을 어떻게든 봉합하려고 일기장을 도닥이고 있다. 


준비없이 본 영화에 그 날 나는 조금은 씁쓸했다. 그러면서 영화는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건조한 라라랜다. 아름다움을 뺀, 날 것의 영화. 이미지적인 걸 말하는 게아니다. 차가운 현실에 질 수밖에 없는 꿈, 놓고 온 것들, 두고온 것들, 버린 것들, 버려진 것들. 그 모든 걸 싸잡아 표현된 태성.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었어야 할 너. 이제 다 끝나버린 이야기에서 나는 갑자기 이렇게나 거대한 뒷북을 치면서 몇 번이고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의 나는 좀처럼 보지 못했던 나다. 지나가리란 걸 안다. 일기장에 들어와 키보드를 도닥이며, 정리한다. 지나갈 걸 알기에. 다시 또 내 손이 닿고, 내가 누리는 일상에, 내가 쓰는 물건들에 감사하게 될 것을 아니까. 이런 일도 있는 거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기갈기 찢긴 마음 덕분에 나는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감사해야 한다. 그래야 마땅하다. 이 이야기는 끝날 것을 아니까. 지금을 고요히 누릴 수밖에 없다. 누리지 못한다면 그저 뭐라도 붙잡고 버틸 수밖에 없다. 넝마가 된 마음이 소리없이 고통을 호소하지만,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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