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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Dec 02. 2016

그 날의 기억

벌써 그 많은 소동이 1년이 넘은 일이 되어버렸다. 묵언수행과 미소로 일관하던 세월들은 꽤 좋은 결과를 주었다. 뭐, 겉으로는 그랬다. 다른 건 잃기도 했지만 마찰이 적었다는 게 결과라면 결과다. 그래서 그 세월은 두 가지 의미를 줬다. 정작 쥐어야 할 건 잃었고 다른 걸 얻었다. 그래서 교훈이 됐다. 이것도 아니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담. 말을 해야겠구나. 그러나 어떻게 한담. 이 지독한 위계질서에서 개인의 소리를 어떻게 내어야 가장 효율적일 수 있담. 나이를 들어야 하는 거구나. 그러나 어찌 그런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렇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겠구나.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인간은 적은 게 분명하다. 아니. 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자기 얘기에 민감하거나 혹은 자기 관심사에 예민하므로 그를 허투루 들을 리 없다. 누구나 마음의 생채기는 크든 작든 안고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게 억울한 일일 때. 그리고 숨 막히는 편견에 둘러싸여 고립무원처럼 말할 곳이 없을 때는 앓게 되더라. 새롭게 알았다.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까. 어떤 게 방법일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 방법이지만 그 중은 자신이 중이라는 사실이 꽤 싫지 않다. 또 그 절의 다른 문화는 사랑한다.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그 중에게 떠나라고 강요만 할 수 있을까. 토 나오는 현실에 가슴이 먹먹한 것을 떠나 더는 답이 없어 그저 할 말이 없다.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시 순응하고 웃으며 사는 수밖에는 없다. 아무리 시간이 주어지고 쉬는 순간이 생겨도 힘든 건 힘든 거다. 그러나 힘들지만 힘들지 않았던 시절이 분명 길었던 나에게 이 시간은 사실 가혹하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그 자체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의 반증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두렵다. 아프다.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그러나 탈출구가 없다. 그래서 자꾸만 다른 수를 찾아야 하나보다. 혹은 다른 회전이 필요하다. 하나의 자세로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프다.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 보니 행복했다가도 다시 현실로 회귀할 생각에 눈이 떨고 얼굴이 떨고 뒷목이 아프고 그냥 웃음만 나온다.


아무런 방법이 없다. 부조리를 목도하고 있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침묵하는 수밖에는 없다. 약자라는 사실이 슬프다. 화풀이를 약자에게 풀어두고 그를 모른 척 방관하는, 정의로운 척하는 그들에게 더 이상 기대가 없다. 역겹다. 그러나 그걸 말할 수 없다. 마음에 쌓이는 부조리에 대한 허탈감이 점점 나를 잠식한다. 그러나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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