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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Nov 28. 2016

기로에 섰을 때

기로에 섰더니 색다른 꿈이 보인다. 하나만을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혹은 그 길에서 느낀 회의감이 나를 강하게 지배하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안면근육이 아프고 눈 근육이 아프다. 아프다고 입 밖으로 내뱉기도 싫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실이니까 말해본다. 내 공간이니까. 그래도 지금 있는 곳이 좋고 하고 있는 일이 좋다고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볼 수 있을까 묻는다면 난생처음 물음표가 든다. 솔직한 마음을 적어보는 거다. 정의로울 거라 생각한 조직의 속내와 결국은 사람 사는 곳 이득을 따지는 곳이었다는 그 슬픈 배경과 결국에 존재하는 그 구조라는 한계. 거기에 개인이 항거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 내가 예민할지도 모른다. 다만 숨 쉬듯이 느껴지는 혐오의 기운을 감지 못할 피해자는 그 어느 곳에도 없다. 이곳처럼, 한쪽의 비율이 극도로 높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물론 내가 1년 전 몸담았던 조직과 비교하자면 열렸지만 그렇다고 열린 곳도 아니다. 반년 전 있던 조직과 비교해보자면 더더욱 그렇다. 비교만큼 무의미한 일이 없고 지금 있는 일에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최선의 답이라 믿어왔는데 그 생각에 의문이 드는 요즘이다. 그랬기에 오늘이 있다고 자부하거나 나를 위로했지만 그랬기에 오늘이 됐다는 또 다른 회의감도 다른 구조에서 올라온다. 새로운 감각이 생긴 느낌이다.


근래의 나는 사실 안정감을 찾은 것도 아니고 불안하기 그지없는 상태도 아닌 그저 숨 쉬고 있을 뿐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은 지친다고 수없이 경고를 받아왔지만 이건 지친 게 아닌 그저 회의감이다. 그렇다고 무엇에 손 놓고 있지는 않을 테니 눈치챌 이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그저 친근한 주위 사람만 내 속내를 듣거나 읽고 공감하거나 위로하거나 나름의 생각을 하거나 할 테다. 그냥 모를 일이다. 저마다 살아온 배경과 겪어온 것과 보는 시각이 다르기에 내가 보는 시선을 주입하거나 할 생각은 없으나 그 공감대를 살릴 이가 적다는 것은 분명 슬프고 또 슬프거나 답답하고 아리고 뻐근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잦은 한숨을 내쉬는 것일 테다.


그래서 곁에 있던 사람이 가끔 그립다가도 없어서 오는 커다란 안정감에 몸을 내맡긴 채 그저 시간을 보낸다.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이런 말조차 우스울 테지만 나는 아직 내 상태를 잘 모르겠다. 그냥 일을 하되 생각지 못했던 세계를 더 깊이 알고 나니 회의감을 느껴 다시 그에게로 도망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을 돌리겠느냐고 물어온다면 단연코 아니다. 그 대답을 하면서 가슴이 아리지만 아니다. 이 감정도 겪어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거나 시간이 나를 잘도 속여 그저 미미한 상처 정도로 남을 테다. 훗날 이런 일이 있었다고 웃으며 꺼내놓거나 안으로 삭이는 일 중의 하나에 불과해질 것이다. 그렇게 해도 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어려워 가슴이 아리지만 그것 또한 그저 그곳에 두기로 했다.


아리고 아파서 어쩔 줄을 몰라도 그 어디 의지할 곳이 없는 게 그냥 인간 본래의 속성인가 보다. 건강한 관계라면 그걸 공유하고 나아가겠지만 세상이 그리 유토피아 같다면 그 많은 일들이 왜 벌어졌겠는가. 그저 오늘 보고 말 사이라고 나도 날 속이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또 마음의 경중이 달라질 수 있다. 기로에 선 것 같다. 벌써부터 그렇다. 그렇게 원했던 길이라서 내가 이 길을 멈추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서 변하는 것은 없을 테지만 그걸 느꼈다는 것 자체로 큰 변화다. 기로에 설 여지조차 내가 나에게 주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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