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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에이드 Jan 04. 2024

낯가리는 엄마입니다

어머님이 누구시니?

"엄마, 민지 엄마가 엄마가 궁금하대."

"왜?"

"민지 엄마가 나한테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물어도 보시고. 그래서 엄마가 궁금한가 봐"

"응. 엄마 낯 가린다고 해."

"나도 엄마가 민지 엄마처럼 학교 자주 오고, 학교 일에 적극적인 거 그런 거 싫어. 너무 자주 오셔. 거의 맨날 오시는 거 같아."


엄마가 낯을 가린다. 꽤 괜찮은 핑계인 것 같다. (그렇다. 핑계 맞다.) 적절한 성격이 표현되기도 하고 관계에 있어서 딱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가 재어진 느낌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저학년도 아니고 6학년이나 됐는데 학교에 갈 이유가 뭐가 있담.' 일을 하게 된 핑계도 있지만 확실히 아이를 통해 이루어진 그 만남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덜해진 건 사실이다. 소위 '공주맘', '왕자맘'으로 불리던 그 어린 시절엔 나도 맘들 모임을 주도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 시작은 '산후조리원 동기 모임'이었다. 첫째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만난 동기들은 마치 전우들처럼 끈끈하고 애틋했다. 삼삼오오 앉아 모르는 사람 앞에서 가슴을 내고 모유수유를 하면서, 기 모빌을 만들면서 하는 출산 이야기는 그렇게 흥미진진하고 공감 갈 수 없다. 수면양말을 신고 도넛 방석을 들고 어정어정 걸어 다니면서, 좌욕을 오가면서 부기가 덜 빠진 얼굴로 만나는 동기들은 애틋함과 함께 빠르게 친해진다. 그렇게 빨리 친해질 수가 없다. 그리고 헤어질 수도 없다. 애들 크는 거 단톡방에 찍어 올려야 하고, 3개월 지나면 문센도 다녀야 하고, 돌잔치 준비해야 하고, 돌잔치하면 찾아다녀야 하고... 어쩌면 누구라도 새로울 육아의 시작을 외롭지 않게 하고 있다는 일종의 연대를 통한 안도감일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그 시절은 그랬던 것 같다.


낯을 가린다라는 것이 한 개인의 사회성을 얘기한다면 나도 '한때'는 한 사회성 했었던 것 같다. 다양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던 시기가 있었다. 친구들을 좋아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환경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퇴근하면 약속 2개 정도는 세팅해서 저녁 먹는 사람들과 영화 보거나 다른 활동을 하는 사람들 일명 하루 두 탕을 즐겨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게 노는 것을 알았고 (체력도 가능했던 시절) 그런 사람에게 받는 에너지가 좋았다. 지하철 막차를 확인하며 타고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열띤 수다는 지금도 향수가 되어 남아있다. 좋은 시절이었다.

 기존 나의 넓고 얕은 인간관계는 결혼, 출산, 육아로 만나는 대상이 좁혀지고 깊어졌다. 한국에서 기혼 여성은 그럴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연령에 따라서 만나는 엄마들도 같이 좌우되니깐 말이다. 늙은 엄마, 젊은 엄마 할 것 없이 내 아이의 사회생활에 우선순위를 두고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맘이 맞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평생 친구 하는 것이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놀이터 친분'이 필요하니깐. 동화책을 읽다가 '엄마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해' 하면서 본심을 말하는 광고카피처럼 우선순위가 밀린 것이다. 아이들을 통한 엄마 모임은 확실히 초등학교 중학년을 넘어서기부터 부담감이 떨어지긴 하는 것 같다. 아이들의 학교 적응이 큰 역할을 한다. 아이들 스스로 일어나는 사회성에 엄마들의 시간이 조금은 분산된다. 엄마들을 보면 의례히 "차 한잔 해요."라고 말하지만 서로 안다. 편하게 헤어지는 인사말인 것을. 진짜로 차를 마시게 될 때의 그 불편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차라리 안 나가고 말지.'


그렇다면 낯가림은 도대체 언제부터 지금의 나를 숨게 하고 아니 편안함을 주고 있는가. 낯가림의 다음 한국어사전의 뜻은 이렇다.

낯가리다
1. 낯선 사람을 꺼리어 피하다.
2. 남을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따라 달리 대우하다
3. 체면을 겨우 세우다

낯을 가리다
1. (어린아이가) 낯선 사람을 대하기 싫어하다
2. (사람이) 친하고 친하지 아니함에 따라 사람을 달리 대우하다.

2번째 뜻에 놀라운 깊은 동의를 느낀다. 나도 모르게 사람과의 친분에 따라 다르게 대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대하는 행동들이 상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사실이다. 점점 편하고 친한 상대와 만나고 싶다. 나를 설명하는 만남은 피로도가 크고 에너지가 급격히 고갈된다. 내가 편한 사람을 만나야 에너지를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과 관심사가 공유되어서 만나는 관계가 편한 관계라면 '아이들의 엄마'여서 함께 했던 것들이 점점 그것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도 이제 내 친구들 만나고 싶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한 몫하고 있다. 한정된 시간에 에너지를 분산해서 사용할 수 없다. 이젠 하루 일과를 마치고도 바로 퇴근하지 못하는 그때 그 체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낯가리는 '친분의 이중성'에 사뭇 놀라게 되는 시간이었다. 굳이 핑계를 대진 않겠다. 이중성 맞다. 그렇게라도 지키고 싶고 숨고 싶은 내가 있겠지. 엄마는 낯을 가린다.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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