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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에이드 May 10. 2024

고집일까? 결정 장애일까?

아메리카노 주세요. 따뜻한 걸로요. 



"뭐 하러 메뉴를 보는지 모르겠네... 늘 같은 것만 주문하는데."
찰스 M. 슐츠, <스누피, 나도 내가 참 좋은걸> 




마음은 그렇다. 오늘은 색다른 걸 마셔봐야지. 카페에 들어가서 메뉴 왼쪽 맨 위줄에서부터 오른쪽 맨 아래까지 정독한다. 따로 크게 붙어져 있는 시즌 메뉴 또한 놓치지 않고 스캔한다. "우아, 이게 색다르다. 알바는 이걸 다 어떻게 만드는 거야. 달달한 거 한 번 마셔볼까?" 그렇게 유난 떨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인간. 그 인간이 바로 나다. "아메리카노 시킬 거면 왜 메뉴를 읽어?" 남편의 공격이 들어온다. "활자 중독이야." 아무 말을 내뱉으며 방어하지만 이미 졌다. 그러게. 처음부터 아메리카노를 시킬 것이지 왜 그럴 읽고 있었을까. 고집일까? 결정 장애일까?  



맘 붙일 아메리카노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아웃렛이나 마트 푸드 코트에 가면 가관인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이제 제법 커서 자기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려 한다. 애들이 돈가스만 먹어서 돈가스 먹느라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는데...(나는 돈가스가 싫...은데 맛있다.) 다들 빠르게 자기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고 진동벨을 가지고 오는데 나 혼자 푸드 코트를 두세 바퀴 돌아도 딱히 먹을 게 없다. "엄마는 오래 걸리니깐..." 오래 걸리는 엄마는 돌다 돌다 커피 마실 판이다. 이쯤 하면 고집이 아니라 결정 장애인 것이 맞나.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결정을 못하는 것인가. 아니 고집 피우고 있는 것인가. 



유튜브에 들어가 결정 장애를 검색해 본다. 심리 전공 교수님들의 썸네일이 쏟아져 나온다. 아무거나 하나 클릭해서 들어보니 선택에는 포기가 따르는데 포기하지 않고 다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다. "면보다는 밥을 먹고 싶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배부르니 고기를 선택하게 되는데 달고 짠 건 싫고 그렇다고 햄버거를 먹자니 너무 헤비 하고..." 나는 왜 하나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 것인가. 이런 나를 알기에 한 번은 짬뽕을 먹으리라 결심하고 푸드 코트에 갔는데 이런저런 다른 음식들을 비주얼 보다가 또 결정을 못하는 늪에 빠져서 아무거나 먹어버린 적도 있다. 도대체 무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얼마나 맛있게 먹으려고.



뭐 그렇다고들 한들 내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살아온 서사가 있을 텐데 나를 책망할 순 없는 일이다. 나는 그런 나를 귀엽게 봐줄 수 있다. 카페에서 메뉴는 정독하되 조용히 아메리카노를 선택한다. 요즘은 베이커리 카페가 많아서 또 빵 구경하다가 정신 줄을 놓아버린다. "각자 빵 하나씩 골라와요." 하는 명령 아닌 명령이 떨어지면 눈치껏 가장 마지막에 겹치지 않은 빵 하나를 고른다. (고르고 골라도 대충 골라도 맛없는 빵은 없다.) 그리고 푸드 코트. 푸드 코트는 가급적 안 간다. 음식점을 정하고 만나는 모임을 선호하고 식구들과도 먹을 것을 정하고 움직인다. 결정이 복잡해지는 순간, 포기하고 싶어지지 않는 순간들을 심플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나를 또 알아간다. 



살면서 있는 많은 결정들은 포기로 시작된다고 한다. 하나를 선택할 때 일어나는 나머지 경우에 일방적이고 단순한 포기 말이다. 누구든 최선의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 선택보다 내가 버린 포기가 더 커 보일 때 생기는 두려움과 무력감들이 선택에 대한 만족감을 떨어뜨리고 결정에 대한 무게감으로 힘들어한다고 한다. 뭐 그런들 어떠한가.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많아도, 결정에 대한 두려움에 결정을 피해도 크게 변하는 것은 없다. 그저 내 모습대로 나를 이어가며 살면 되는 것이지 않은가. 어떠하든 나는 나다. 나는 내 모습이 참 좋다. 괜한 무게로 자신을 누르고 싶지 않다. 



퇴근이 가까운 남편에게 전화가 온다. "나 퇴근해. 오늘 저녁 뭐 먹어?" (오케이. 내가 확실히 결정해 볼게.) "먹고 들어 와." 심플하게 단호하게 결정의 순간을 벗어났다. 



<상단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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