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이전 사진을 정리하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 다시 오지 않을 아이들의 그때 모습에 대한 이별,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한 테 얽히고설켜서 눈물이 된 것이다. 그렇게 지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된 시간들이 이제는 희미하게 기억되는 시간으로 넘어가 버렸다는 것도 인정하기 힘든 상실감이다. 잃어야 오늘을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잠시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무른 것으로 과연 무엇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인가. 사진이 정리되면 추억도 정리될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내 마음은 뒤흔들려 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크고 있다. 이는 지난해에 140 사이즈를 입었던 애가 한 철이 지나지 않아 커 버려 다시 옷을 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키가 언제 크려나. 몸무게가 왜 이렇게 안 늘지.' 하는 신체적인 것이 아니다. 슬슬 말 수가 줄어들고 자기 생각과 내 생각이 다름을 표현한다. 어른들이 정의해 주었던 언어의 세계가 변하고 자기들의 언어를 쓰고 있다.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더 즐거운 시간이 스멀스멀 생기고 있다.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갈 곳을 바삐 검색할 때가 있었다. 나들이 갔다 집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나가자고 해도 안 따라 나온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크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다. 그 거리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돌아보면 나의 사춘기 시절도 그러했다. 중학교 친구들과 처음 함께 갔던 맥도널드를 잊을 수가 없다. 대여섯 명이 함께 갔는데 그때 햄버거 맛은 낯설었지만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수다와 푸릇한 느낌은 기억 속에 신선하다. 감자튀김을 한데 모아서 케첩에 찍어먹으며 왜 그렇게 깔깔대었는지... 늘 바빴던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달라며 엄마의 손길을 그리워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친구들이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일하시느라 피곤했던 부모님은 나에게 말을 걸 힘조차 없이 들어와서 코 골며 잠드셨다. 친구들과 함께 쓰는 교환일기와 다이어리 꾸미기에 나는 밤새 심심할 틈이 없었던 거 같다. 그렇게 멀어져 간 거리만큼 다른 관계에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내 아이들도 그 입구 어딘가에 있겠지. 당연한 순리이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크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의 상실감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들에게 나를 채워달라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하기에 에너지와 집중력이 이전만 하지 못하다. 그러기에 그렇게 멀어지는 것이 맞다. 그 헛헛한 마음을 뒤로하고 각자가 성장하는 것이 맞다. 섭섭한 것이 있지만 그래도 잘 크고 있는 것이다. 나와 아이들 모두가 잘하고 있다. 언젠가 큰 애가 나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깔깔거리며 웃으며 말했다. "엄마, 뭘 그렇게 성장하려고 해?", "야, 그게 다 기록이야." 성장하고 싶은 40대 여성들의 활발한 인스타 감성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엄마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은 다 자리고 싶은 열망이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내일이라기보다 하루가 만족감으로 채워지는 그런 성장 말이다. 내일보다 지금, 지금 이 순간 바라보는 이 시간을 더 사랑하고 충만하려고 존재한다. 아무튼 잘 자라줘서 고맙다. 삶의 증거가 되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