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도씨 Oct 27. 2020

어느 날 글쓰기가 무서워졌습니다.

글쓰기 VS 글 안 쓰기

 성인이 되고서도 어느 정도의 시기가 되기까지 말을 잘하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편하지 않았기에 피했고, 피하다 보니 더 힘들었다. 조잘조잘 시끄럽게 잘도 떠들어대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대화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정을 쌓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잠깐 동안 오고 가는 몇 마디의 말이 때로는 서로를 얼마나 가깝게 만들 수 있는가.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교류하는 또래들을 부러워하다가, 부러움이 부끄러웠다. 민망하고 싶지 않아 혼자여도 좋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혼자만의 방, 고독의 세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이란 몇 없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누군가가 써 놓은 글을 따라 읽다 보면 홀로 있어도 글쓴이와 그리고 세계와 소통하는 듯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존재인 스스로를 이해할 수도 있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갑갑한 물속에서 바깥으로 빼낸 작은 빨대 구멍 같은 거였다. 빨대를 통해 숨이라도 쉴 수 있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어느 날 문득 글쓰기가 무서워졌다.


 할 수 있는 게 그거라, 하고 싶은 것도 그거라 인생에서 놓지 않으려 했다. 하지 않으면 숨이 막힐까 봐 그랬다고 말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언제나 열정을 쏟아온 것도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해왔기 때문일까. 남는 게 있었다. 소설로 등단을 했다. 한 참을 기뻐했다. 나라는 존재가 인정받는 것 같았고, 내게 있어서 소중한 영역에서의 성과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주위에서 보내주는 축하가 고마웠다. 내게 "작가"라고 불러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두려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먼저 등단을 했던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함부로 글을 쓰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기대를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생각보다 별로다."


 글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한 사람의 말이었다. 나는 가르칠 역량은 안 되고 같이 글을 쓰며 나누자고 제안했다. 내가 준비한 글을 읽은 사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수치스러웠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상처를 주려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당시에 나는 증발이라도 하고 싶었다. 


 발표된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검색창에 제목을 넣었다. 크게 이목을 끌지 못했던 것이었는지 감상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러다가 한 카페에 올라온 게시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에 같이 발표된 소설에 대해 짧게 평한 글이었다. 여러 평 중에서 가장 먼저 내 이름을 찾았다. 이름 옆에는 달랑 한 줄이 쓰여 있었다. 비웃음이었다. 


 상처를 받았지만 다행스럽게도 더 잘 쓰고 싶었다. 

 

 잘해야지. 더 잘해야지. 스스로를 재촉했다. 어떻게 더 잘 쓸 수 있을까.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결국 3다(三多) 밖에 없었다.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 읽고는 있는데 재미있지가 않았다. 생각하려고 하는데 떠오르는 게 없었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 채 깜빡거리는 커서를 3시간 동안 바라본 적도 많았다. 그래, 정말 많았다.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자연스레 그냥 하던 것들의 방법을 떠올리려고 노력할수록, 어려워진다. 숨을 쉬어야 하는데, 숨을 잘 쉬고 싶으니까 그 방법을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바보 같지만 그랬다.


 점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일단 써보라는 충고가 들리기도 했다. 도움이 될까 봐 진짜 막 써봤다. 의미 없고 진실성 없는 단어와 문장들을 보고 있자니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글 밖에 못 쓰는 내가 창피하기만 했다. 거지 같은 글을 보고 싶지 않아서 흰 화면을 바라보며 한 시간, 두 시간… 고민했다. 무언가 떠오르기까지 기다리고 있자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글을 쓰지 않을 때에야 오히려 숨을 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안 되겠다. 이번 주는 안 되겠다. 에잇 모르겠다. 이번 달도 안 되겠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당신,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 왜 안 쓰는 거야?"


 아내가 묻는 말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분명 나는 글 쓰는 사람이고 싶은데. 그 마음은 여전히 큰데. 답답한 마음에 관심을 가져주는 아내에게 지금은 글쓰기에 대해 말하지 말아 달라고까지 얘기해버렸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한 때 글을 쓰고 싶다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던 나를 그럼에도 받아주고 품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괴로운걸 어찌하는가. 잘 쓰고 싶은데 잘 안 써지는 걸 어찌하란 말인가. 많이 읽는 게 도움이 될까 싶어 책을 더 읽었다. 한 명의 작가가 갈고닦은 실력으로 피와 땀을 쏟아 만들어낸 작품을 앞에 두고 무엇을 느낄 수 있겠는가. 아직 한 참은 부족하고 초라한 나의 모습을 확인할 뿐이었다. 수준의 차이가 느껴질수록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결코 저런 경지에 이르지 못할 거야.' 듣고 싶지 않았는데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힘이 빠졌다. 그렇게 6개월이 또 지나가고 있었다.


 점점 회사 생활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그저 밥벌이나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살게 됐다. 힘들고 피곤하면 유튜브랑 게임, 예능과 영화, 드라마 같이 웃으면서 시간을 잘 보내게 해주는 것들이 주위에 충분히 많았다. 편하고 즐겁게 사니 시간은 더 빠르게 흘렀다.


 글쓰기를 앞으로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난 그래도 괜찮은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실력이 없어서 초라한 글을 쓰는 게 무서운가, 글을 앞으로 더는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서운가. 둘 중 하나는 버려야만 했다.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교통사고가 무서우니까 운전을 하지 말자. 실수할지도 모르니 회사에 나가지 말자. 싸우면 힘드니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지 말자. 너무 바보 같지 않은가. 사는 게 힘드니 그냥 살지 말자라는 선택지를 붙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저 잘하고 싶은 마음을 먹었을 뿐인데, 그 마음이 더 잘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상을 받았다고 내가 엄청난 실력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 전과 그 후의 나는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고하고 바라보는 게 달라져버렸다. 엄청난 대가들의 글을 보면서 나와 비교했다. 마치 내가 그럴 만큼 성장한 사람이라는 듯한 전제가 깔려있지 않았나. 그게 아닌데. 원래 그들은 나의 비교 상대가 아니었는데. 내 글은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만큼만의 수준일 게 뻔한데. 더도 말고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내 글일 뿐인데. 쓰고 또 쓰고, 읽고 또 읽고, 고민하고 또 사고해야만 딱 그만큼만 더 좋아질 수 있는 거였는데.


그렇구나.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딱 내가 해 온 만큼뿐이구나.


  내 글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아야 했다. 별로다라는 말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했다. 수준이 낮은 글이면 내 실력이 그 정도인 것이고, 내 수준이 높다면 결과물도 좋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스스로를, 실력을, 작품을, 현실을, 존재를. 누군가의 비웃음을 사게 되더라도 상관없어야 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겼다면 정말 그 정도였을 테니까. 사람들에게 냉정한 평가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감사한 일이 아닌가. 읽어만 줘도 고마운 게 아닌가. 


 나에게, 사람들에게, 세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지금 나는 이 정도입니다. 뭐 어때요. 뭘 더 어쩌겠어요.”  


 그제야 숨이 자연스럽게 쉬어졌다. 글쓰기보다 글 쓰지 않는 것이 더 무서웠으므로 쓰고 있다. 잘 써야 한다는 압박을 벗어버리자 읽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쓰는 것도 조금, 아주 조금 더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전 11화 멈춰서 있고 싶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