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것은 나의 어리석음이다.
멈춰서 있고 싶다. 그 말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변화되는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에게 모든 순간은 변화다. 하루에도 신체가, 마음이 자라간다. 어제의 아기가 하룻밤 새 조금 더 커진다. 아이는 키가 클 때에도, 이빨이 잇몸을 뚫을 때에도 알게 모르게 아파한다. 아프다.
학교를 가고,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오고. 직장에서도 매일 매일이 변화다. 오리가 물에 떠 있기 위해 물속에서 다리를 쉼 없이 젓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 하루의 소망이 ‘그저 오늘처럼, 내일도 무사히’가 된 지 오래지만, 오늘 같은 내일은 없다. 새로운 사건, 관계, 고난, 시련 앞에서 나는 또다시 다리를 굴려야 한다.
가만히 있고 싶다. 조용한 관망을 품고서. 그렇다면 변화는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탈피에 으레 따라오는 고통도 태어나지 아니한다. 누군가 물었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고통의 부재라고 생각했었다. 괴롭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 아니겠느냐. 곧 가만히 있는 것. 변하지 않는 것. 가지 않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그래서 서성거린다. 그저 여기에 있기만 한다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적당한 기쁨일 수도 있다. 어쨌든 만족할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연은 말한다. 고여있는 물이 썩고, 호흡이 부재한 생물은 부패한다. 설령 내가 저주를 피해 붕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간은 흐르고, 손으로 잡으려 해도 새어나가는 것을 붙들 수는 없다. 삶은 굴러가고, 세상은 옆을 무정히 지나친다. 모두 오늘을 떠나 내일로 나아가고, 내일의 그들은 멈춰있는 것들을 가차 없이 부순다. 가만히 있는 것들은 그렇게 잊혀 갔다.
멈춰서 있지도, 그렇다고 나아가지도 못하는, 나는 그저 울음을 삼키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다 되어가고, 기다리다 지친 삶은 곧 질문을 던질 것이다. 충실히 너의 삶을 살았더냐. 나는 무어라 대답할까. 상처 입는 것이 두려워 숨겨두었다고 말하면, 삶은 내게 어떤 표정을 지어줄까.
고통이 두려워 도태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까. 아프더라도 살아있는 것이 나을까. 어리석은 자는 알만한 답을 모른 채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처받지 않음은 상처의 부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한다. 결국, 있어야 없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고, 없어져야 있던 것의 자리를 깨달을 수 있다. 고통받지 않고서는 고통의 부재 따위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행복도 서서히 멀어지게 될 것이다.
살아있음은 곧 상처받음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있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곧 아픔을 견디며, 멈춤의 유혹과 싸워가야하는 것일지도. 오늘을 견뎌내기 위해, 나는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