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 - 09.01

가정의학과 파견

by 그라스데오

드디어 6개월의 파견 끝에 가정의학과 파견을 시작하게 되었다. 게다가 집 근처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어 그나마 조금 편하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당직이 많은 파견이라 대부분 병원에 갇혀있기 마련이었지만, 그래도 집이 가깝다는 것이 괜히 기분 좋았다.


새로운 병원, 새로운 과, 새로운 교수님들. 모든 것이 새로워서 두려운 마음도 많았지만 좋은 윗년차 선생님들이 많아서 긴장한 것 치고는 꽤 수월하게 파견 근무를 이어갈 수 있었다.


동네에 있는 의원에서 가정의학과는 1차 진료를 주로 담당하게 되어 간단한 질환들을 주로 보게된다고 하지만, 대학병원에서의 가정의학과는 방향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금방 느꼈다. 어딘가 명확한 질병으로 오기보다는 어딘가 진단 기준에 부합하진 않지만, 본인이 느끼는 불편함으로 타과를 돌다 입원한 분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기억에 유독 남은 환자분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몇십년간 다니던 분이었다. 불편함이 시간에 따라 쌓여가면서 복용하게 되는 약들은 많아졌고, 그런 약들의 부작용들도 당연 쌓이면서 환자분들 짓누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어지럼증, 불안함, 수면장애, 만성기침 등. 사실 매일 같이 회진을 돌 때 아프다고 한 곳은 아팠던 적이 없었다고 했고, 아주 새로운 아픈 곳이 생겨서 몇 분간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모습을 신체화 장애라고도 하는데, 아무런 내과적 이상이 없지만 다양한 신체증상을 반복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칭한다. 과학의 끝에 서있는 직종중 하나가 의사라고 하는데, 이렇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질병이 신체의 증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면서 안타깝기도했다. 특히 이 환자분의 정신과 진료 기록을 보면 가정의 불화, 끝없이 호소하는 답답함과, 다른 이들의 무관심과 무시가 쌓여서 마음이 몸을 지배하게 된 것 같았다. 마치 하나의 출구를 만들어낸듯.


나 역시 병원 근무를 시작하면서 언제부턴가 마음속에 많은 두려움들이 자리 잡히기 시작한 것 같다. 이전에는 힘든 일이 있어도 담대하게 맞이했고, 어느 정도의 용기와 기쁨, 설렘이 곁에 있었는데, 지금은 괜한 불안함과 절망이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듯 감정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너무나도 큰 영향을 끼치는데, 살아가면서 이런 감정을 억누르는 것만 배우면서 지내온 것 같기도 했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쿨하게 넘기는 것이 덕목인마냥.


정신과 공부가 부족해서, 교수님과 윗년차 선배님의 치료 방향을 그저 따르기 바빴지만, 해당 환자는 그래도 조금은 호전을 보인 상태로 퇴원하시긴 했다. 비슷한 진단을 받은 환자를 본다해도 솔직히 치료를 원활하게 하여 퇴원시킬 자신은 여전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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