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 - 03.14

외과 파견

by 그라스데오

병원의 새로운 시작은 3월 1일부터지만, 시작하는 날부터 모든 업무를 물 흐르듯 이어할 수 없어 비공식적으로 거의 한 두 달, 많게는 6개월에서 9개월 이상으로 미리 일을 시키면서 교육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턴 중에 전공의 업무를 시작한 인원들을 흔히 ‘픽턴’이라고 칭한다. 인턴 업무를 수행하면서 픽턴일까지 같이 하는 것이 쉽지 않아 대형병원에서는 픽턴 업무를 공식적으로 금지한다.


정형외과는 일이 워낙 많고 힘들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픽턴들에게 일을 넘겨주려 한다. 그래도 대형병원이기에 적정선에 맞춰 일을 알려주는데, 퇴근했을 시간이나 상대적으로 편한 파견과일 경우에 일을 부탁하면서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가끔은 그냥 막 시킬 때도 있지만.


나는 응급의학과 파견이었고, 근무 당시에는 결코 일을 시키지 못하는 파견과로 지정되어 픽턴 업무의 부담은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파견 근무는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쉬는 방식이었는데, 그날은 24시간 일하고 바로 마취과 파견 인계를 받아야 했다. 친구와 약속한 시간상 퇴근하여도 3시간밖에 못 잘 상황이어서 일하면서 틈틈이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일이 너무 많아서 정말 한숨도 못 자고 내리 24시간을 일했다. 사실 한두 가지 할 일이 있어도 조금은 깔아 두고 몸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성격상 그러지 못한 게 너무나도 큰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새벽시간에 외래 방 담당이어서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처음으로 공황 발작 환자들이 느낀다는 갇히는 그 기분을 맛보았다. 솔직히 환자가 없어서 좀 누워 있을 법했지만, 언제든 교수님이 들어오실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해서 내내 앉아 있던 게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해당 증상이 심각하게 나타난 게 아니어서 별문제 없이 퇴근하고 당직실에서 잠시 잠을 청했는데, 그 짧은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났을 때 지남력이 떨어진 사람처럼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딘지 떠오르는데 몇 초나 걸렸다. 게다가 그 건조한 난방 바람과 밝은데 정신은 몽롱한 상태. 그렇게 취약한 상태에서 핸드폰을 보니 예비 2년 차 정형외과 선생님들의 단체 메시지가 200개 이상이나 보내져 있었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 느껴지는 부담감, 항상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가득했다. 그런 마음이 새로운 시작을 하기 전에 당연하게 있는 무지함과 겹쳐 순식간에 두려움이 되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그 작은 당직식 방의 벽들이 밀려 들어오는 듯했고, 비록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지만, 애써 머리로 내 마음을 진정시켜 위기를 벗어나야겠다고 스스로를 지켜나갔다. 그러는 과정 가운데 내 마음에 자리 잡힌 한 생각이 바로 정형외과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미 10명 중에 한 명으로 뽑혔던 정형외과를 떠나 무언가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가정의학과를 온 것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그 특유의 제식 문화를 견디지 못했을 거라 했지만 사실 그런 체계를 은근히 편하게 생각하며 성격도 너무 급해서 잘 맞을 거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유전이 어디 가겠냐 하는 마음도. 또 한편으로는 비공식 의국 면접에서부터 윗년차들의 구박이 이미 그려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굳건히 닫히게 된 것 같았다.


그만두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정말 당직을 한 번도 서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챙겨줄 수 있는데, 그럼에도 그만둬야겠냐고 재차 물으셨다. 아버지의 체면에 큰 누가 되는 것을 잘 모르긴 했다. 병원 문화에 전혀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그렇게 나 혼자 편해서 일이 절대로 되지 않는 곳임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게다가 눈은 떴을 때 그 작은 당직실 벽들이 내게 밀려오는 듯한 그 기분이 너무 생생해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겠다는 마음에 결단코 그만두기로 했다.


여담이지만 후에 법이 바뀌어 인원 공백이 어쩔 수 없이 생긴다고 했을 때 다시 하려고 했지만, 공식 면접을 보지 않았기에 다시 할 수도 없다고 하여 씁쓸한 마음과 함께 과를 떠났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의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 그나마 관심이 있던 것이 스포츠 의학이었는데, 그걸 내 발로 차버렸다는 생각에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내지 못했던 것 같다.


언제까지 이 후회가 이어질지 모르겠다. 흔히들 말하는 발작버튼이 생긴 건 아닌지. 글로 심정을 써 내려가면 마음이 좀 나아질까 했지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시간을 기다려봐야겠다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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